올해는 이런저런 강의를 참 많이 들은 해다. 일을 그만둔 것도 있지만, 워낙에 새로운 것 배우기를 좋아해서 가능하기만 하다면 일단 듣고 보는 성격도 한몫했다. 한창 들어야 할 강의가 몰려 있을 때는 '이 정도는 다 들을 수 있겠지.' 하며 자만했던 과거의 나를 매우 치고 싶었다.
어제 올해 듣는 마지막이 될 라이브 강의를 들었다. 주제는 "오랫동안, 건강하게 일하기". 프리랜서들을 위한 강의였는데, 강의 중간 Q&A 시간에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 프리랜서로서 나만의 강점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건강 때문에 8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갑작스럽게 그만두고, 새로운 분야의 일을 접해보니 완전 생초보인 내 주변에는 그야말로 잘하는 애 옆에 잘하는 애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가지 고민을 하던 차 답답한 마음에 좀 애매한 질문을 했는데, 연사였던 김신식님은 이런 우문현답을 주셨다.
조정시간이 필요해요. 조정시간을 갖고 내가 하루 동안에 무엇을 생산했는지 쭉 지켜보다 보면 겹치는 키워드가 생기고, 그게 나만의 강점일 수 있어요.
조정시간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조정하는 시간이다. 내가 할 일부터, 집중해야 할 것, 관심을 둘 것 등 여러 가지 나에 대한 것들에 대해 타협하고 조율하는 시간.생각해보니 어려서부터 나는 제대로 된 조정시간을 갖지 못했다. 대학 졸업식도 하기 전에 회사에 들어갔고, 다음 회사로 이직을 할 때는 주말을 보내고 바로 다음 주 월요일부터 새로운 회사에 출근했다. 육아휴직을 하는 동안에도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이나 시간을 쪼개어 할 수 있는 것을 끊임없이 했던 것 같다. 지금도 퇴사 후에 또 새로운 것을 배우고 프로젝트에 참여하다 보니 5개월이 훌쩍 지나있었다.
이렇게 사는 게 열심히 사는 거고, 무언가라도 남을 거라는 생각에 앞만 보고 달려왔지만 10년이 넘게 이렇게 지냈더니, 아마 내게도 번아웃이 온 것 같다. 그리고 주변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꽤 있지 않을까. 물론 열심히 살아온 덕에 여러 가지 이룬 것들도 있고 경험한 것들도 많다. 하지만 요즘은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다가도, 한 번씩 현타가 오면서 급격하게 무기력해진다. 때로는 아예 다 놔버리고 싶을 만큼 지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제 1시간 30분 정도의 강의가 끝난 후에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역시 "조정시간"이었다. 어렸을 때 TV에서 화면조정 시간에 뜨던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요즘은 이런 화면을 찾아볼 수 없지만)
나는 성격상 뭔가 사부작사부작 하기를 좋아해서 가만히 쉬는 것을 잘 못하는 편이다. 무작정 쉬라고 하면 오히려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제 신식님께 들은 조언대로 이번에는 조정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은 어떤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곰곰 지켜보고 생각하면서 담 며칠만이라도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다. (일단 진짜 물리적인 정리가 시급하다. PC 바탕화면부터 이렇게 정신없게 놔두는 건 또 오랜만인 듯. 하하)
번아웃이 왔거나 무언가 힘들어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그대도 조정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마냥 있는 것이 마음이 불편하다면 최소한의 일만 하고, 나머지의 시간은 나에 대한 것들을 지켜보고, 타협하고, 조율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렇게 조정시간을 갖고 나면 나만의 온전한 색을 낼 수 있는 에너지가 조금은 충전되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