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감기 걸린 것 같으면 약 먹지 말고 테스트기 해봐요
나에겐 내 후배였던 아가씨 외에도 12살 차이, 띠동갑의 막내 아가씨가 있었다.
처음에는 마냥 귀엽고 예뻐 보여 어린이날에는 선물도 사주고, 데리고 나가 놀아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점차 크면서 시어머니와 아가씨의 행동을 보고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가족이 된 이후로 친해져서 그런 거 일 수도 있겠지만, 엄마와 언니의 모습을 점차 닮아간다는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이혼 전 마지막 명절이었다. 시댁은 추운 지역이라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옷을 여러 겹 껴입고 갔다.
며칠 지내며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시어머니께서 "너 감기 걸렸니?" 하셨다.
그래서 그냥 "네 그런가 봐요. 그래도 아직은 괜찮아요." 하고 대답했다.
그때, 옆에 있던 막내 아가씨는 이렇게 말했다.
"언니 혹시 감기 걸린 것 같으면 감기약 먹지 말고 테스트기 해봐요!"
순간 이성의 끈이 놓아졌다.
그 당시 나는 병원에서 임신이 어렵다는 진단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시댁에 얘기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보다 한참 어린아이가 뭘 알고 말했을까 싶다가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순간 얼굴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당사자는 생각도 없는데 자꾸 임신 얘기 안 했으면 좋겠어요. 상대방이 어떤 상황에 놓인지 모르면서 그런 말 하는 거 실례예요. 저는 아직 준비가 안됐는데 계속 그렇게 아기 얘기하면 제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큰 소리를 내지도 않았고, 화가 난 어조도 아니었지만 단호한 내 말에 시어머니께서도 토끼 눈이 되어 쳐다보셨다.
그도 그럴 것이 시댁에서는 내 상황을 모르고 있으니 당황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그 순간 '내가 어린애한테 괜히 이런 얘길 했나?' 싶었지만 이제는 애한테까지 임신에 대한 조언 아닌 조언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했다.
가이드라인이 없는 시집살이.
나는 언제까지 이 길을 걸어야 하나 답답해졌다.
그래도 전에는 웃으며 받아낼 수 있었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가벼운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다.
계속 들려오는 상처되는 말들과 태도들.
그 상황에서 내가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잠시 쉬어갈 곳도 없었다.
왜 나는, 나는 왜? 이렇게까지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나.
돌아보니 결혼 후 자존감이 참 많이 낮아져있었다.
언제나 웃고 떠들고 주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긍정적이고 활달했던 나인데, 누군가의 아내 혹은 며느리로 살아가는 내 모습은 침체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내 모습엔 끝이 없어 보였다.
어느새 내 눈엔 눈물이 고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