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할 수 없고 오늘도 할 수 없었습니다. 삼가 마음이 열리는 길한 날을 가려 선생의 축수를 위해 바칠까 합니다. 난초 하나 바위 하나가 별을 따기보다 어렵군요. 참담하게 애를 써보았지만 허망함을 느낍니다. 비록 그리지 않았으나 그린 것이나 진배없을 따름입니다.
-조희룡(1789~1866), 「한와헌제화잡존」 中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조선 후기의 화가, 조희룡의 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처음 붓을 잡을 때 쉬이 쳤던 난들이 세월이 익을수록 점점 뻗어내기가 힘들어집니다. 몰랐던 일들이 안목에 잡히니 경지가 남달라져 이젠 풀 한 포기 그려 넣기가 새삼 힘든 일이 되었습니다. 마음이 열리는 '개심'의 시기가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그간 애쓴 노력들이 허망해지는 순간이니 화가의 마음이야 오죽할까요. 그러나 마음속에 수 없이 그려졌을 그림들은 또 다른 경지에서 새로이 그려질 겁니다. 중요한 것은 붙들고 지내는 끈질김입니다.
무엇을 함에 있어 처음에 가졌던 초심이 중하다 여겼는데 조금 살다 보니 초심은 초심일 뿐, 지금을 지키지 못하는 마음이란 걸 알았습니다. 지금 중요한 상황에 초심만 찾는다면 정작 일기일회一期一會의 마음을 내지 못하고 일대인연을 얻지 못하는 좁은 안목에 갇히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심도 마찬가지, 자신이 진심을 낸다고 해서 타인도 진심을 낼 거라는 착각에상처가 더욱 깊어지게 되더군요. 마음의 마케팅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가 지녀야 할 덕목은 시간의 변화가 주는 지금 이 순간에 내야 할 '즉심卽心'입니다.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미움, 시기, 질투, 증오의 마음 또한 사람의 마음이라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지금을 성실히 살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지금 최선의 즉심을 내어 보십시오.
불가에서 쓰이는 죽비의 효용은 잠을 깨우는 경책이 아니라 뭉친 어깨를풀어주는 배려가 먼저입니다. 배려야 말로 인간사에 꼭 있어야 할 최고의 마음입니다. '즉심'의 바탕색이기도 하고요. 몇 날 며칠을 끙끙거린 화가의 배려가 지금을 살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