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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락 Mar 04. 2020

시지프 신화

서평

시지프 신




작가 소개: 지중해의 지혜와 북아프리카의 감성을 함께 지닌 작가, 태양과 청춘에 대한 그 오래되고도 신선한 찬가를 노래했던 카뮈는 1913년 알제리에서 태어나, 가난과 질병, 그리고 빛과 바다의 무분별한 축복 속에서 어린 시절과 청춘을 보낸다.

그림자 없는 빛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았던 그는, 또한 세계란 동쪽 저 끝에서 손뼉을 치면 서쪽 저 끝에서 울린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러한 그의 세계관은 삶에 대한 부정과 긍정, 인간과 세계와의 연대의식으로 그를 이끌어갔는데, 그의 대표적 소설 『이방인』과 『페스트』, 에세이『시지프 신화』『반항하는 인간』, 그리고『칼리귤라』와『정의의 사람들』과 같은 희곡작품들은 그러한 세계관의 산물이다. 또한, 자기 속에 은밀하게 내재해 있는 시인의 목소리에 마음을 닫을 수 없었던 그는 『안과 겉』『결혼』『여름』과 같은 시적 비전을 담은 산문집을 펴내기도 하였다.

언제나 시대의 고뇌 한가운데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선두에 서서 항거하고 증언하며, 자신의 최고 덕목인 진실과 자유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던 그는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그로부터 3년 후, 마흔일곱 살의 나이에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남으로써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1. 부조리의 추론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다소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에세이『시지프 신화』는 인생의 가치를 묻는 철학의 근본문제로 출발하여 카뮈가 말 한대로 부조리의 감수성을 펼쳐놓고 있다. 카뮈의 질문은 하나다. 죽을 것이냐, 살 것이냐. 이  문제를 두고 햄릿은 괴로워했지만 카뮈는 명확하게 시론을 전개한다. 죽음이라는 엄청난 부조리가 버티고 있는 한 인생은 살 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필경 그것은 하나의 진리다. 과연 자살만이 삶의 부조리를 극복하는 방법일까. 카뮈는 자명함이라는 단 하나 빛 속에서 논리적인 극한에 도달하는 물 한 모금 없는 황량한 장소(정신의 자살)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론을 밀고 나간다.

부조리는 세계를 의식하는 순간 발생된다. 의식이란 ‘낚아채는 때’를 말한다. 인간은 세상에 알맞게 살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요원한 일이다. 나와 타인, 나와 가족, 나와 회사, 심지어는 나와 나 사이에서도 단절이 발생한다. 단절을 깨닫는 순간, 무대장치의 붕괴를 느끼는 순간, 부조리와 나는 더는 떨어질 수 없고 떨어져서도 안 되는 관계가 성립된다. 즉, 나와 세계의 중간에 부조리한 공간이 들어서는데, 카뮈는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을 차용한다.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에서 神은 성부, 성자, 성신을 모두 합한 하나의 개체로써 세 개 중에 하나가 사라지면 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는 이론이다. 인간의 삶도 이 또한 마찬가지로, 나와 부조리, 세계 중에 어느 한 곳이 무너지면 인간도 부조리도 세상도 존재 근거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부조리의 감정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내일, 나의 전 존재를 다하여 거부해야 하는 마땅한 내일에 대한 육체의 반항, 습관에 의해 가려졌던 무대장치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며 마치, 사랑하던 여인의 얼굴이 낯설어 보일 때 우리는 고독해진다. 이러한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이 두 번째이다. 어떤 때 거울 속에서 나를 만나러 오는 이방인, 나 자신의 사진 속에서 다시 보는 친근하면서도 불안스러운 형제, 이 또한 부조리의 감정이다. 부조리는 나를, 세상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세 번째는 나와 세상 사이에 있는 단절, 그 상태이다. 세상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세상의 습관에 빠져있는 나와 어느 순간 그런 나를 발견하는 나 사이에서 부조리가 발생한다. 이때 카뮈는 말한다. 멈춰라. 단절되었음을 인정하고 사막에서 사유가 살아갈 수 있는지를 열정을 가지고 알아내야 한다. 즉, 단절은 열정을 이끌어내는 밧줄이 된다. 비로소 부조리는 우리가 규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살아가는 지침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막에서 사유가 살아갈 수 있는지를 열정을 가지고 알아내야 하는 태도, 그 정신적 태도는 어떤 것일까. 사유가 사유 자체에 대한 성찰을 한다는 건 모순이다. 카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들어 모순을 증명한다. "모든 것은 진리다."라고 주장할 경우에 그에 대한 반대의 주장도 진리가 되기 때문이다. 반박의 틈이 벌어진 명제는 그 자체로써 가치가 무용해지는 것이다. 이성으로 이성을 사유하는 일은 철학자들이 지니는 오래된 한계였다. 최초의 질문으로 시작되어 무의식으로 귀결되는 이 지난한 철학적 사유는 아직도 순환되어지며 질문과 해결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카뮈는 일련의 철학자들을(하이데거, 야스퍼스, 키에르케고르, 체스토프, 후설 등) 제시하며 그들의 철학을 부정한다. 철학자들은 모두 삶의 근본에서 출발하여 최종적으로 회피나 신에게로의 도피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유희나 사유의 곡예를 떠나 진실을 구분하는 방법은 정직함에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인간적 차원으로 환원시켜 인간의 낙인을 찍어놓는 것이라고 카뮈는 주장한다. 그렇지만 나와 세계를 통일하고자 하는 열망은 세계와의 차이와 다양성만 입증할 뿐, 결국 철학자들의 사유 순환과 마찬가지로 악순환만 되풀이될 뿐이다. 통일성에 대한 희망은 인간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가만히 있으라."는 순종을 요구할 것이다. 침묵은 세계와의 합의를 언뜻 이끌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이 깨어나는 순간, 부조리를 의식하는 때에 나와 세상은 금이 가고 끝내는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되지 말 것, 이거야말로 자기 스스로 반항에 지친 정신적 외침이다. 이 외침이야말로 부조리한 인간의 모럴이다. 멈추어진, 생각하지 못하는 정신은, 형이상학적 자살이다. 카뮈는 자살을 부정한다. 죽지 말자는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에게 대전제는 없다. 목표, 그것은 순간에 생기는 반항이어야 한다. 정해진 건 없다. 끊임없이 살아있는 정신, 그것이 부조리의 정신이다. 부조리한 인간이 현재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고집스럽게 버티는 것이다. 유일하게 일관성 있게 균형감을 유지하며 철학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내가 외치고 내가 듣는 메아리가 될지라도, 그 허망한 기쁨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날 줄 알아야 한다. 안주할 것이냐? 회피할 것이냐? 카뮈는 위 둘을 다 거부하며 자신에게 명령한다. 부조리를 직시하라, 울타리에서 이탈하지 말고 반항하라. 가능의 영역에서 살아가는 것, 인간이 동일한 조건에서 한정된 운명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중요한 건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산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같은 처지에서 같은 경험을 하면서 어떻게 내가 많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경험을 의식하는 건 내 자신이다.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많이 산다는 것이다. 순간순간을 의식하는 살아있는 정신이야말로 부조리의 활시위를 팽팽히 지탱시키는 손이다.



부조리한 사람이 예감하고 있는 세계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으나, 정해진 규칙이 없다. 한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때 규칙은 완성될 것이다. 남겨지는 유산이 보잘것없고, 유서 없는 죽음이 될지언정, 때려도 흔적조차 남지 않는 핏기 없는 육체로 돌아간다 해도 우리는 죽을 때까지 행동하고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결정된 규칙이 또 어느 누구에게서 만들어질 수 있도록. 이 세계에는 정해진 규칙이 없다는 것, 이것이 규칙이다. 이 규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2. 부조리한 인간

 
돈 후안(의식): 돈 후안은 스스로 자신이 유혹자임을 의식하고 있다. 그 점에 의해서 그는 부조리한 인간이다. 한 여자에 만족하지 않고 수많은 여인들을 최대한 상대하며 그 여자들과 더불어 삶의 기회를 남김없이 소진한다. 그는 여자를 수집하지 않는다. 수집은 자신의 과거를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어떤 존재와 맺어주는 힘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사랑은 사랑의 한 형태일 뿐, 다른 존재와 여러 형태의 혼합되는 힘을 똑같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돈 후안의 사랑의 존재방식은 통일성이 없고 다양하다. 사랑조차도 부조리하다.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다른 사랑이 시작된다. 이것이 돈 후안이 여성에게 삶을 베푸는 방식이다. 카뮈의 결혼 또한, 여자와 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과 하는 것이었다. 거리낄 것 없이 사랑할 권리, 그 권리 자체가 카뮈에겐 사랑이었다. 즉, 사랑은 대상이 아니라 향유였다.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에 익숙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니체가 한 말이다. 카뮈는 니체를 사랑했다.

연극(지성): 그 모든 삶 속으로 파고들어 삶의 다양함을 골고루 경험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그 삶들을 연기하는 것이다. 배우는 필연적으로 소멸되어 있는 것 가운데서 군림한다. 카뮈는 연극을 사랑하고 다수의 희곡을 집필하기도 했다. 특히 『칼리귤라』『계엄령』은 프랑스 전역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 시론에서도 부조리의 의식을 ‘무대장치의 붕괴’라는 표현 했다. 역할이 끝나면 배우는 죽는다. 그러나 역할이 바뀌면 배우는 또 다른 삶으로 산다. 죽음을 극복하고 다양한 삶을 경험하는 것, 육체가 곧 왕이 되는 배우는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이다.

정복(정신): “그렇지 않다. 내가 행동을 좋아하다 보니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서는 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나는 내가 믿는 바를 완전하게 정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것을 굳게 믿고 있거니와 확실하고 명확한 눈으로 보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건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어서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고 하는 자를 믿지 말라. 그들이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겉핥기 식으로 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복자의 조국은 피조물의 세계다. 그들의 유일한 행동은 인간과 천지를 다시 만드는 행위이다. 그러나 정복자는 인간을 만들지 못한다. 그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복자들은 ‘마치 만들 수 있는 것처럼’해야만 한다. 정복의 길은 육체와의 전쟁이며, 육체만이 그들의 확신이기 때문이다. 영토 확장이 정복자의 위대함이 아니다. 위대함은 항거와 내일 없는 희생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느 순간 자신이 어떤 신과 동등하다고 느끼는 적이 있는데, 정복자들은 그러한 의식을 끊임없이 뚜렷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관조와 행동 중 어느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는 늘 찾아오게 되어 있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나 자부심을 가진 마음에게 중간이란 있을 수 없다. 개인을 짓뭉개는 것은 세계요, 그를 해방시키는 것은 나 자신이다. 흡혈귀 앞에서 십자가를 드는 시대는 끝이 났다. 칼을 들고 행동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살기 위해선 운명을 정복해야 한다. 운명의 극복은 인간이 오만해서가 아니라 가망 없는 우리의 조건을 뚜렷이 의식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에게 연민을 느낄 때가 있다. 이것만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동정이다.

결론: 세계가 그토록 나와 비슷하고, 마침내 그토록 형제같이 느껴지자, 난 행복했었고, 여전히 행복하다는 걸 느꼈다. 모든 게 완성되기 위해서는,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기 위해서는, 내게 남은 소원이 있었다.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기를…. 사형을 목전에 둔 뫼르소의 독백이다. 그는 삶의 이방인이 아니라 칼자루처럼 죽음을 손에 쥔 정복자였다.

이처럼 존재는 생성과 변화를 거쳐 체험되는 것이지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 증명은 경험을 받아들이는 의식 속에서 스스로 빛날 뿐이다. 사형수가 맛보는 기막힌 자유로움, 삶의 불꽃 이외의 모든 것에 대한 엄청난 무관심, 죽음과 부조리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온당한 자유로움, 인간의 가슴이 경험할 수 있고 체현할 수 있는 자유의 원리는 죽음을 대면하는 부조리의 찬란한 귀결이다. 그것은 사형수만 느낄 수 있기에 온당 진실하다.

 
3. 부조리한 창조

 
부조리와 더불어 숨 쉬는 것, 세계의 부조리를 지탱해나감으로써 맛볼 수 있는 형이상학적 행복이란 것이 존재하게 된다. 정복 혹은 연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랑, 부조리한 반항, 이러한 것들은 미리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전장에서 바로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에 바치는 경의인 것이다. 부조리가 주는 교훈을 알아차리고 그 피와 살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부조리한 유희의 전형은 다름 아닌 창조이다. 창조한다는 것은 두 번 사는 것이다. 카뮈는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사고의 최종적 야망이라고 단언한다. 창조의 중요한 점은 세계를 설명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실감하고 묘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술 작품은 부조리의 피난처가 아니라, 작품 자체가 부조리의 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부조리한 작품은 정신의 병, 그것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타자와 대면시킨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정신에게 어리둥절한 혼돈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인이 다 갇혀있는, 출구 없는 막다른 길을 정확하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기 위해서라 말한다. 진정한 작품에는 어떤 인생의 목적도 의미도 위안도 될 수 없다. 인간의 척도로 진리를 잴 수 있는 작품, 창조자의 경험 속에서 도려낸 한 토막, 내면의 광채가 집약되어 있으면서도 제한됨이 없는, 다이아몬드의 한 조각처럼 적은 것으로 찬란한 광채를 내는 작품이야말로 부조리한 창조의 전형이다.

인간의 마음속에서 집요하게 되살아나는 것이 희망이다. 가장 헐벗은 인간도 희망에 동조하고 만다. 평화에 대한 갈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찬동은 빛의 제신과 진흙의 우상을 만들어 낸다. 여기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희망은 환상이다. 우상이다. 작가란 자기 직업의 위대함을 이루는 두 가지 책무, 즉 진실과 자유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책무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자기의 정당성을 발견한다. 카뮈의 노벨상 수상소감의 한 대목이다.

 키릴로프: 키릴로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에 등장하는 인신 사상가이다. 그는 세상에 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자살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는 것을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는가?”자살을 비웃는 스타브로긴에게 확신을 가지며 되묻는다. 신이 빼앗아 간 자유, 그 자유를 되찾아 온 키릴로프는 자신의 자유를 긍정하기 위해서 권총 자살을 결행한다. 그는 예언한다. 자신이 죽으면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인간적 영광으로 휘황하게 빛나리라는 것을. 키릴로프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절망이 아니라 이웃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키릴로프는 예수는 믿었지만 신의 존재는 믿지 않았다. 예수가 존재하지 않은 신 때문에 죽었듯이 자신도 거짓에 속아 죽을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관자놀이에 피스톨을 들이대고 자살을 했다. 즉, 인류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기에 내가 신이 될 수 있으며 스스로 죽을 수도 있음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에게 의지하여 희망을 걸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키릴로프는 외친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자유에는 한계가 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며 인간의 절대적 자유를 외쳤을 때 이 위대한 철학자의 나라에서는 초월적 정신의 자유를 문자적으로만 해석하여 전쟁의 근거로 사용했다. 즉, 인간이 신이 되었으니 모든 것이 허용되었다는 논리였다. 침략이 용인되고 폭력은 수단이 되었다. 거짓과 불의에 대항하고자 했던 반항의 근거가 자유의 이름으로 또 다른 폭압이 된 것이다. 한계 없는 자유는 똑같은 이유로 또 다른 노예를 만들 뿐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악의 쇠사슬에 묶여 있더라도 선을 향해 끊임없이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조리와의 투쟁은 정해져 있는 도덕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존엄성을 훼손시키지 않는 도덕적 태도를 지탱하기 위한 투쟁임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 희망이란 영원히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만으로도 부조리의 고행은 얼마나 고단한 것인가. 창조자의 심오한 사상은 부단히 생성, 변모하면서 한 생애의 경험과 어울려 모습이 다듬어진다. 그 사상이 정지되는 때는 죽음이다.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죽음에 맞서는 삶에 있어서 고통과 절망, 실패와 환희를 맛볼 것이며 그 속에서 그의 생이 다듬어지고 모습을 얻어낼 것이다. 삶이 주는 비통한 절규 속에서 확실한 언어를 발견하는 것, 무한히 생성되고 반복되는 필연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사랑하는 것, 우연을 믿지 않으며 현재라는 돌덩이를 끌어안은 채 끝없이 전진하는 것,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불모지에서 정신과 육체를 증명하며 살아남으려는 욕망에 휩싸이는 것,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로 탄생되는 부조리한 인간, 지난한 일상 속에서 유희를 발견하는 그의 덕목은 열정이다. 그리하여 열정은 예술로 귀착되며 예술 속에서는 고요도 활기를 띤다. 창조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에 어떤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다.

 
4. 시지프 신화

 
경련하는 얼굴, 바위 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등 온통 인간적인 확신이 보인다. 시지프는 신을 멸시하고 죽음을 증오하였다. 올림푸스의 신은 이 부조리한 영웅에게 형벌을 내린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 이 보다 더 끔찍한 형벌이 있을까.


카뮈는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는 정상에서 내려오는 시지프를 본다. 잠시 동안의 휴식,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끝장을 볼 수 없는 노동을 향해 내려오는 시지프의 걸음을 지켜본다. 시지프는 우월하다. 바위보다 우월하다. 부조리한 것에 대한 반복적인 의식, 성공의 희망은 터럭만치도 없는 불모의 땅을 위해 다시 내려오는 시지프. 무의미한 노동의 연속,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도 반항적인 시지프는 삶의 모든 전모를, 비극적이고 비참한 운명을 알고 있다. 그는 바위를 직시한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의지는 운명보다 우월하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구원이 없는 세계,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불모의 땅, 황량한 사막에서 어쩌면 자신의 존재를 증명을 위해서 버티는 것이 아닐까. 허무주의자란 아무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미지의 그것, 보이지 않는 초월은 항상 사람을 들뜨게 만든다. 들뜨지 말자. 부조리는 나를, 세상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나와 세상 사이에 있는 단절, 그 고통이다. 자신의 고통을 응시하고 삶에 긍정이 서린 눈길을 보내며 행동하는 것이 부조리의 정신이다.



5. 정리(부조리한 반항)



절대적 자유는 일체의 가치를 파괴하고 절대의 가치는 일체의 자유를 말살한다.

-쟝 그르니에


그르니에의 가치는 정의를 뜻한다. 자유와 정의가 서로 상충되어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한계를 끼워 놓음으로써 둘은 서로를 보완한다. 자유의 한계는 정의가 나서야 할 이유가 되고, 정의의 한계는 자유를 누려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한계의 태도는 정직하다. 한계가 없는 것은 신이 가지고 있는 특권일 뿐이지 인간이 뺏어 와서 누려야 할 특권은 아닌 것이다. 그건 회피다. 인간은 신이 될 수 없기에 신을 거부한다. 이게 반항이다.



반항의 기원은 나는 무죄하다는 것이다. 반항하는 자가 불의를 따를 수 없는 것은 불의가 정의의 반대편 의자에 앉아있는 걸 눈 뜨고는 못 볼 지경이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억압자와 피억압자 사이에 놓인 탁자의 크기보다 더 커진 오해로 인해 심연의 적의를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최선을 얻을 수 없기에 최악을 선택하는 상황이 되풀이되선 안 된다. 이 경우에 침묵은 불의의 이로운 수단이 된다. 결단코 우리 세계의 비극은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가, 인간이 가진 한계를 직시하고 분명한 언어로 묻고 답해야 한다. 뜨겁고 밝은 것이 태양의 특성이라면 열정과 명철은 인간을 더욱 빛나게 해 준다.

또한 반항인의 도덕은 추상적 원리를 통해 만들어진 도덕률이 아니라 계속해서 항의하는 운동 가운데 반항의 열기를 쫒아가며 도덕의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길은 옛 부터 정해져 있는 것도,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그의 도덕 원리들은 바로 이 순간, 우리가 존재하는 지금 그 원리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가 하는 일이라곤 도덕을 강요하는, 즉 통제의 수단으로써 도덕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 이건 세계에 맡겨 놓으면 된다. 인간은, 세계에 둘러싸인 인간은 수단을 거부하며 오직 인간, 자기 자신이 세울 수 있는 도덕을 쟁취해야 한다. 이것이 반항의 모럴이다. 여태 세계가 지탱해왔던 이성적 도덕성은 원점에서 다시 제고되어야 한다. 은총 속에 머무르던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세계 속에 내던져진 부조리의 코기토로 대체되어야 된다.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자유가 목적이 되면 자유의 노예가 된다. 목적 있는 삶은 스스로 수단이 되고 도구화된다. 목적 없는 자유, 부조리 속에서 유일자인 인간이 도달해야 할 궁극이다.

그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최선은 경험만큼 가치 있는 것이 없다. 인간의 모럴과 가치척도는 경험의 다양성과 양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똑같이 경험되어진다면 모럴과 가치가 똑같아질까. 아니다. 최대한 많이 의식하는 것, 자신만의 삶, 유희, 반항을 최대한 느낀다는 것, 이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산다는 것이다. 즉 경험의 양은 의식의 횟수와 정비례한다. 의식의 횟수에 의해 정신은 명증성을 획득하고 가치의 척도는 무용해진다. 부조리에는 미래가 없다. 준비된 미래보다는 닥쳐있는 현재가 중요하다. 오늘을 산다는 건 내일도 이렇게 살아야겠다는 의지의 발로이다.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 현재의 땀방울에서 변화되는 것이리라.

다시 돌을 들어 올리는 시지프의 팔뚝에 ‘불 속에서 통째로 단련된 의지’가 모아진다. 끊임없는 성실성,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우주에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내는 명철함, 산정을 바라보며 입술을 굳게 다무는 정직성.


시지프는 분명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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