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태사역』
개태사역을 찾아가는 길, 목적지가 전방 60m 부근에 있다는 네비게이션의 기계음이 들린다. 차를 멈추고 보니 대로변이다. 차들은 4차선 위를 시원하게 질주하고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역이 있을만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네비게이션이 안내를 잘못 한건가 싶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일단 차를 놔두고 걷기로한다. 좁은 길을 따라 20미터 정도 걸으니 작은 굴다리가 보인다. 순간 밀려드는 반가움, 근처 어딘가에 기차역이 있다는 소리다. 길이 난 곳을 따라 무작정 걸었는데 개태사역이 아니라 개태사에 닿았다. 그렇다면 개태사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입구로 들어서니 양쪽에 조성된 작은 연못이 눈길을 끈다. 그 위에 떠있는 초록의 연잎과 분홍을 품은 연꽃이 내 가슴속에 머문다. 잠시 발길을 멈추고 연못가의 돌위에 앉는다. 작은 연꽃이라 사랑스럽다. 게다가 꽃이 몇 송이만 활짝 피어있어 더욱 돋보인다. 잠시라도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에 몰입할 수 있는 지금, 행복이 소리없이 나에게 다가선다.
얼마전, 내가 근무하고 있는 역에 노신사가 찾아왔다. 역 근처에서 숙박을 하고 이른 아침에 역을 산책하던 그분이 인사를 건네며 하던 말, 천국에서 일하시네요……. 나는 야간 근무를 마칠 무렵, 역주변을 둘러보던 참이었다. 분천역, 누군가에게는 천국으로까지 보이는 기차역이다. 나는 과연 천국이라고 느끼고 있는가, 천국에서 일상의 절반을 보내고 있는 나는 행복한가, 지금……. 스스로를 향한 질문에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좋은 것도 일상이 되면 원래 그런거라고 대수롭지않게 넘겨버리곤 했는데 넘치지 않고 겸손하게 피어있는 연꽃을 바라보며 삶을 향한 내 욕심이 너무 과한건 아닌가, 생각하게된다. 내가 가진 것들도 충분히 많은데 늘 만족 하지 못한 채 허공을 향해 의미없는 손짓만 해대는 기분이다. 요즘들어 내 일기장을 메우는 주제는 공허와 허무다. 5일, 살아온 날들이 그저 허무하다, 내가 이뤄놓은 게 뭐가 있나,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11일, 마음의 공허함을 메워줄 그 무언가가 있으려나, 나는 무엇인가. 23일, 허전하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듯하여, 무언가가 되고 싶다…….
담담하게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고 싶으면서도 정작 마음 한구석에선 다른 무언가를 붙잡고 싶어 하는 나, 정작 ‘무언가’의 실체도 모르면서 늘상 헤매고 있다. 어쩌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에 만족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찾아 헤매는 일이 더 쉽고 편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가슴속을 꽉 채워줄, 형체도 없는 것을 찾아 헤매다보면 특별한 어떤 것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음 때문일지도……. 머리와 가슴이 늘 따로 움직인다. 이것도 병이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특별한 어떤 것을 찾으려는 병……. 수수하고 소박하며 단아한 연꽃같은 삶, 삶에 대한 무게중심이 온전히 내 안에 있는 삶을 살고싶다. 이 또한 욕심이려나.
개태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완성을 기념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천년이 넘는 유서깊은 사찰이라는데 실제로 마주하니 오래된 절이라는 느낌은 받을 수 없다. 원래 개태사지터는 다른 곳이라는데 그래서그런지 주변 경관도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우리 고장의 부석사를 자주 본 탓인지 몰라도 개태사역을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고려태조 왕건의 어진을 모시고 있다는 어진전을 둘러보면서도 미술에 문외한인 나는 그냥 누군가가 그린 옛날 초상화 한점을 보는 듯 무덤덤하다.
이곳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개태사를 창건했을 때 부엌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무쇠솥이 있다. 사찰 내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범종인가 싶어 가까이 가니 오래되어 약간은 파손된, 커다란 솥이 보이는 게 아닌가.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자신의 소망을 담아 솥안에 던진 지폐와 동전도 제법 많다. 이 솥이 정말 천년의 세월을 거쳐온 게 맞을까, 쓸데없는 생각을 잠시 한다.
개태사를 나오며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를 본다. 자신의 몸을 지탱하지 못해 지지대를 받쳐놓았다. 감이 너무 많이 열려 무거운건지, 나이가 많아 혼자 힘으로 서는 게 버거운건지. 개태사는 나에게 오래된 감나무와 작은 연꽃이 피는 사찰로 기억될 듯하다.
개태사역을 찾아 걷는 길, 길가의 남천이 예쁘게 물들었다. 꽃보다 아름다운 남천이다. 작은 굴다리를 하나 더 지나니 숨어 있는 개태사역을 만난다. 굳게 닫힌 철창너머로 개태사역이 조용히 서 있다. 개태사역은 무인역이다. 직원이 근무하지는 않지만 기차는 이곳을 지나다닌다. 물론 이곳에서 기차를 탈수는 없다. 역사 앞에 빈 깃봉 3개가 유난히 높아 보인다. 오래전에는 태극기와 코레일기와 무재해기가 펄럭였을 것이다.
예전의 외양을 간직하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려놓은 개태사역의 사진을 본적이 있다. 철조망이 쳐지기 전이니 아마도 기차가 이곳에 머물다가던 시절의 사진일 것이다. 젊은 청춘처럼 빛나고 있는 역의 모습이었다. 아직은 바람과 비를 잘 견디며 버티고 있는 개태사역이지만 몇 년 후에는 지금의 모습은 분명 아닐 것이다. 기차역의 일생도 사람의 삶과 닮은 구석이 많다. 탄생하면 큰 주목을 받고, 화려한 전성기를 거쳐 아무도 시선을 주지 않는 장년기와 노년기를 맞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젊은 시절을 길게 보내는 역과 그렇지 않은 역이 있다는 것 뿐.
세월을 들이마시며 살아가는 기차역을 둘러본다는 것은 나의 지난 날을 뒤돌아보는 일이자 앞으로의 삶을 설계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