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 문화창고를 가다

『연산역』

by 정정심

내가 근무하고 있는 분천역을 방문하는 고객들이 자주 묻는 말이 있다.

“여기가 진짜 기차가 다니는 역 맞아요?”

“예, 영동선의 보통역 맞습니다. 관광열차도 다니고 무궁화호도 다닙니다.”


기차가 다닌다는 내 말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곤 한다. 분천역이 다른 기차역과는 달리, 예쁘게 잘 꾸며져 있어 관광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는 뜻이다. 연산역을 보며 나 역시 마음속으로 ‘아니, 여기가 기차가 다니는 보통역이라고?’를 외치고 있었다. 어린 자녀들과 함께 역을 방문한 부모들이 많아서 놀랐고, 아이들이 하루 종일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즐길 거리가 풍부해서 또 한 번 놀랐다.


연산역은 1911년 7월, 호남선 개통과 함께 문을 열었다고 한다. 1950년에 역사가 소실되고 1957년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역을 보는 순간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역을 방문하며 찍었던 사진을 찾아보니 충북 영동에 있는 이원역이랑 비슷하게 생겼다. 박공지붕을 중심으로 왼쪽으로는 길고, 오른쪽으로는 좀 더 짧은 직선 지붕이 어깨를 겨누고 서 있다. 양쪽으로 뻗은 지붕 때문인지 정면에서 바라본 역사가 제법 커 보인다.


안으로 들어서니 벽면에 작은 나무판을 여러 개 이어붙인 장식이 걸려있다. 보통은 역에서 작은 그림이나 사진, 시화류 등을 많이 보아왔다. 뭔가 싶어 자세히 보니 그야말로 센스 만점인 내용이 적혀있는 게 아닌가. 제목은 ‘특이한 기차역의 이름들’이라고 붙여놨다. 몇 개를 옮겨보면 이렇다. 마라톤 선수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은? 월계역, 매일 병원에 가는 역은? 아포역, 포토샵이 필요 없는 역은? 보정역. 늘 뜨거운 역은? 화산역, 코로나가 없는 역은? 음성역, 짜장면의 제맛을 느낄 수 있는 역은? 사천역. 인터넷에 떠도는 것들을 옮겨온 건지, 직원이 직접 만들어낸 건지는 몰라도 읽고 있는 동안 웃을 수 있어 참 좋았다.

20241009_140150.jpg 아이들의 천국, 연산역


‘한국철도 100주년 역 기념인’ 100가지를 한자리에서 만나는 재미도 있다. 철도 공사가 되기 이전인 1999년, 철도청에서 한국철도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전국 100개 역에 각 역의 특징을 살린 기념스탬프를 제작하여 비치했다. 봉화역은 지역특산물인 송이를, 전주역은 조선 시대의 성문이었던 풍남문을, 영월역은 동강에서 리프팅 하는 모습을 새겨넣는 식이다. 기차와 기차역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국의 역을 방문하여 다양한 디자인의 도장을 모으기도 했다. 나도 다른 지역의 스탬프는 본 적이 없는데 이곳에서 100개의 도장이 모두 찍힌 나무 액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읽던 책의 뒷면에, 또 누군가는 작은 노트의 여백에 도장을 찍으며 흐뭇해하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다. 기념스탬프는 기차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다.


연산역 옆에는 기차 문화체험관이 있다. 객차 4량을 연결하여 2량은 아이들의 놀이공간으로, 나머지 2량은 도서관과 기차 문화전시관으로 이용하고 있다. 실제 모양과 비슷한 장난감 주방 기구는 물론, 품 안에 안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인형, 맑은 소리를 내는 알록달록한 실로폰 등이 준비되어 있어 누구나 자유롭게 가지고 놀 수 있다. 하루 종일 뒹굴며 책을 볼 수 있는 작은 도서관, 온몸을 던져 뛰어놀 수 있는 볼풀장은 덤이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은 아마도 살아있는 토끼가 아이들을 반겨주는 토끼장인 듯하다. 나는 토끼가 아니라 토끼에게 먹이를 주느라 정신이 팔려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것이 더 즐거웠지만 말이다.


역 외부에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공간이 있다. 바로 ‘연산문화창고’다. 역 주변에 있던 옛 곡물창고를 문화공간, 예술공간, 놀이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그야말로 복합문화공간이다. 건물마다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었다. 지역민을 위한 창의 예술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담쟁이 예술학교, 어른들은 차를 마시며 아이들이 물놀이 즐기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는 커다란 카페, 스마트팜에서 직접 수확을 하여 요리를 체험할 수 있도록 설계된 알곡 놀이터와 식물체험관, 거기에 야외 놀이터까지. 어른뿐 아니라 아이에게도 최고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20241009_135833.jpg 연산역을 찾는 이들의 소원이 적혀있는 나무

연산은 기차역과 마을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발전하고 있었다. 쇠퇴해가는 기차역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으로 예전부터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바였다. 누구나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게 바로 연산 문화창고와 같은 프로젝트가 아닐까. 지자체를 비롯한 각종 단체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크고 작은 사업을 수행하지만 시작할 때와는 달리 프로젝트의 존속성에 있어서는 후한 점수를 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놀이터에서 행복하게 모래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를 보며, 아빠와 함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아이를 보며 나는 ‘연산문화창고’ 사업이 이루어낸 성과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연산역 근처에 고급술집, 양복점, 한약방, 아이스크림 공장 등이 있어 번화가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연산 대추골 역전마을’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과거의 향수만을 전하며 정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공간으로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지역사회와 소통하고자 만들어진 연산문화창고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꼬마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KTX를 향해 손을 흔든다.

“진짜 빨리 지나간다.”

아이는 기차가 지나간 방향을 여전히 바라보며 서 있다. 안에 탄 사람의 형체조차 볼 수 없는 KTX다. 아쉬워하는 아이의 마음이 내게도 전해진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를 자랑하는 고속열차가 아니라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손을 흔들 수 있는 무궁화호라는 생각을 한다. 어쩌면 내가 무궁화호가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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