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촌역』
오랜만에 통영 마리나리조트를 찾는다. 건물이 바다를 끼고 있어 예전부터 좋아하던 곳이다. 직원복지 차원에서 회원가 이용이 가능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종 찾게 되는 숙소이기도 하다. 오가는 거리를 빼고 나면 2박 3일간의 일정이라도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지만 떠나오니 마음만은 한없이 여유롭다.
리조트 안내데스크 앞에는 체크인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번호표를 뽑고 보니 내 순서는 한참이나 멀었다. 무료하게 기다리는 것보다 생수라도 사 오는 편이 나을 것 같아 편의점으로 향한다. 생수를 고르고, 계산대 앞으로 가니 직원이 없다. 안을 기웃거리는데 젊은 남자 직원이 음료수 상자를 옮기고 있다. 무거운 상자를 들고 있는 것 같아 잠시 머뭇거리는데도 인기척을 못 느낀 건지 계산대로 나오지 않는다.
“저기요!”
무작정 기다릴 수 없어 할 수 없이 직원을 부른다. 내 목소리를 못 들은 건가, 대답이 없다.
“저기요, 계산 부탁드려요!”
목소리를 좀 더 크게 해서 불러본다.
그제야 직원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계산대 앞에 선다. 아무런 대꾸 없이 물병의 바코드를 찍더니 계산기의 자판을 신경질적으로 ‘탁’ 친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한마디…….
“키오스크 저기 있어요!”
몇 년 묵은 책장에서 묻어나는 먼지의 더께처럼 짜증을 한껏 담고 있는 목소리다. 나이를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집 큰애보다 두서넛 정도 많아 보인다. 키오스크가 있는 줄 알았으면 거기에서 계산을 했을 텐데 난 입구에 놓인 기계를 보지 못했다. 차라리 키오스크에서 계산 부탁한다고 얘기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자식 또래의 직원에게 화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아, 그래요? 키오스크를 못 봤어요. 죄송합니다.”
키오스크를 못 봤다는 말만 하려고 했는데 무심결에 죄송합니다, 라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고객을 대하는 직장인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무조건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일이 몸에 밴 듯하다. 언짢은 기분으로 편의점을 나오며 죄송하다고 내뱉었던 말을 휴지통에 주워 담아 바다로 흘려보내고 싶었다. 다시 들어가 친절 교육을 제대로 시키고 싶지만 꾹 눌러 참는다. 어느새 마음 한쪽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이 정도의 일로 기분 상해하는 나 자신이 사뭇 못마땅하다.
괜한 일에 마음 쓰지 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듯 율촌역은 포근하게 나를 반긴다. 오래전 폐역이 되었건만 언제라도 기차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높낮이가 다른 지붕 여러 개가 모여있어 다른 기차역과는 확실히 차별화된다. 왠지 모를 풍요로움과 안정감까지 느껴진다. 철길도 걷어내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어 운치를 더한다. 지붕이 낡아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국가 등록문화재로서 잘 관리가 되고 있다고 여겨진다. 2011년, 여수~순천 간 선로이설로 현재의 위치로 역사를 이전하였다고 하는데 주변에 도서관, 크고 작은 식당, 작은 시장이 자리 잡고 있어 지금도 역 주변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텅 빈 철길과 역사를 한참이나 바라보는데 도로변에 작은 승용차 한 대가 선다. 지역의 노인복지센터에서 온 차다. 지팡이를 지고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리는 백발의 노인 두 분과 그 뒤를 따르는 직원들. 그들은 활짝 웃으며 역 앞에 있는 의자에 가 앉는다. 들고 온 검은 봉지를 풀어놓는데 회가 푸짐하다. 율촌역으로 나들이를 나온 듯하다. 오래전, 기차를 타고 다니며 젊은 시절을 바쁘게 보냈을지도 모를 어르신들이 이제는 역을 찾아 회 한 젓가락에 추억을 담나 보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백일홍과 해바라기가 떠오른다. 선로 주변에 키 작은 백일홍이나 해바라기가 풍성하게 피어있으면 사람들이 더욱 많이 찾는 명소가 되지 않을까. 아니면 단풍나무를 일렬로 심어 붉게 물든 단풍잎을 바라보는 것도 제법 멋스러울 것 같다. 기차를 타고 올 수 없는 역이 되었지만 많은 사람을 품 안에 껴안을 수 있는 역으로 거듭날 수 있다면 좋겠다.
역 주변을 둘러보는데 팥죽집 간판이 몇 군데 눈에 띈다. 여수 율촌이니 팥죽보다는 해물칼국수가 더 어울릴법한데 나는 오랜만에 팥죽 맛을 보기로 한다. 사랑 손 팥죽. 양이 많아 놀라고, 정갈한 반찬에 또 한 번 놀란다. 진한 팥죽을 후후거리며 먹고 있자니 누군가가 와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다정함과 친절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이런 인사를 받아본 것이 언제던가.
“아, 네, 안녕하세요?”
나 역시 팥죽을 먹다 말고 절로 공손해진다. 홀서빙하던 여자분이 주방장이자 남편이라고 남자를 소개한다. 인사 한마디에 팥죽은 배로 맛있어진다.
사는 게 뭐 별건가,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마음을 담아 “안녕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되는 거지. 안녕하세요, 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마음을 담아’가 늘 어렵다.
‘사람……’,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문제의 대부분이 발생한다. 얼마 전 법륜 스님의 강연회에 갔다 왔다. 상대방이 나와 다름을 인정하면 된다고……. 스님께서 즉문즉설을 할 때마다 들려주는 말씀이지만 들을 때마다 새롭다. 머리로는 끄덕이지만 실천은 늘 어렵다. 마음을 담아 하는 짧은 인사가 ‘다름’을 인정하는 작은 실천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