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첫발 내딛다.
2017년 7월 29일.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전날에 이미 버스표를 구해놨기 때문에, 당연히 앉아서 편하게 갈 것이라 생각하고 나섰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역무원이 전역에서 이미 만차이기 때문에 어제 예약한 사람들까지만 서서라도 태워서 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휴가철이니만큼 평소보다 더 오래 걸릴 수 있기 때문에 환불할 사람들은 해주겠다고 한다. 시작부터 꼬이려나.. 한참 고민을 하다가 그래도 차를 가지고 가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하에 1시간 30분을 서서 가기로 했다.
정말 버스는 만차로 왔고, 다음 정거장부터는 태우지 않고 바로 공항으로 갔다. 다행히 시간은 평소 시간만큼만 소요되어서 아무 탈 없이 진행이 되었다.
이번에 탈 항공은 아에로플로트다. 악명이 높은 항공사다. 수화물이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면 본전이라고 한다. 출발 전에 검색해보니 최근에도 분실 및 도착하지 않아서 일정이 꼬인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내용 캐리어 하나와 수화물 캐리어 하나를 준비해서 첫날에 필요한 것들은 기내용에 전부 담았다.
다행히 휴가철인데도 아에로플로트는 줄이 길지 않아서 금방 수속을 밟고 면세점 구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에는 티켓팅하고 수속 밟는데만 1시간 반 이상이 걸렸는데 이번에는 금방 끝나니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에는 면세점에서 살 것도 없었기에, 와이프와 나는 바로 라운지로 향했다. 앉아서 아침을 간단히 맥주와 함께하고 (항상 여행의 시작은 맥주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 게이트로 갔다.
러시아 항공은 경유시간에 따라 수화물의 분실과 도착 안 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이유인즉슨, 모스크바 공항이 워낙 넓기 때문에 짐이 이동하는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고 했다. 경유시간이 1~2시간 이내면, 분실 가능성이 크다고 해서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나의 경유시간은 3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항상 그렇듯이, 정시에 수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정시 출발이 되지 않았다. 1시 15분 출발 비행기였는데 곧 출발하겠지란 생각에 잠들었다. 나름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서 푸른 하늘을 생각하며 창밖을 봤는데 아직 공항인 것이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였다. 이때부터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환승 비행기를 놓치지는 않겠지만, 혹시나 캐리어가 도착하지 못하면 어떡하지란 생각에 신경이 쓰였다.
약 1시간 정도 지연이 된, 2시 10분경에 비행기는 드디어 이륙을 했다. 인천공항이 점점 멀어지고 이내 구름 위로 올라서자, 기내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처음에 하얀색 봉지를 주길래, 땅콩인 줄 알고 열었는데 이어폰이 들어있었다. 보통 헤드셋을 줬는데 이어폰을 이렇게 주니 나름 참신하기도 했다. 나 말고도 주변에 땅콩인 줄 알고 오픈한 사람들이 많았다. 다들 쑥덕쑥덕 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온다.
좌석 앞에 메뉴판이 있길래 어떤 것들이 제공되는지 한번 봤는데, 한국어임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잘 안 되는 메뉴들이 많았다. 대충 짐작은 되지만 구글 번역기를 돌려서 그런 건지 많이 어색하다. 기내식을 먹는 것은 항상 설렌다. 여행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두 개밖에 없는 메뉴도 한참을 들여다보며 무엇을 먹을지 고민해본다. 항상 옳은 치킨요리를 먹기로 결정했다.
기내식이 나오기 전에, 마실 음료부터 서비스를 해준다. 항상 맥주 또는 와인을 마셨는데, 아에로플로트에서는 맥주를 서비스 안 해준다. 신기하기도 하면서, 이런 항공사는 처음 봤기 때문에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그래도 와인 주는 게 어디야란 생각으로 와인을 달라고 했다.
스타벅스 Tall 사이즈의 컵에 한가득 따라주는 와인잔을 받아 들고, 곰곰이 생각했다. '와인을 이렇게나..?' 생각해보니 '러시아 = 술'의 공식이 떠올랐다.
술에 대한 스케일이 남다르게 관대한 나라인 것 같았다.
와인을 한 모금씩 하면서, 창밖의 하늘과 구름을 보면서 감상에 젖어들었다. 적당히 알딸딸해지는 느낌에 살짝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 나 지금 여름휴가 떠나고 있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몽롱해진 기분으로 창밖을 보고 있는데 기내식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난 당당하게 치킨 요리를 주문했고, 와이프는 생선 요리를 주문했다. 일단 비주얼은 나름 괜찮았다. 냄새는 삼계탕의 향이 조금 나기도 했다. 삼계닭. 대충 예상했던 음식의 맛이었기 때문이다.
크게 한입을 먹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맛이 있었다. '내가 중학교 첫 가정실습시간에 만든 요리 같은 맛'.
실소가 나왔다. 무엇을 기대한 것인가.. 보통 기내식이 하늘에서 먹으면 맛이 없다고는 하지만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치킨만 나름 골라서 먹고, 샐러드로 마무리를 하려고 했다.
샐러드를 한입 먹는 순간, 입안에 가득하게 퍼지는 향긋한 흙냄새 덕분에 이 마저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와이프 메뉴를 먹었는데, 훨씬 맛있었다. 둘 중 하나의 선택이었는데 이걸 실패한 것이다. 디저트라도 먹자란 생각에, 같이 제공된 케이크를 한입 먹었는다. 여기서 내가 미친 x처럼 실실 웃고 있으니, 와이프가 왜 그러냐고 물어본다. 반쯤 정신 나간 모습으로 말했다.
케이크에서 에프킬라 레몬향 맛이 나
그래도 제공된 메뉴 중에서는 가장 먹을만했기 때문에 케이크는 다 먹었다. 입안에서 나는 에프킬라의 향을 느끼며 말이다.
다행히 출발 전에 라운지에서 간단히 아침을 했기 때문에 배고픔이 없었다. 모스크바까지 9시간 정도 날아가야 하기 때문에, 잠도 잤다가 영화도 봤다가 최선을 다해서 9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 항공에서 제공한 음식 서비스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이 나왔다. 바로 아이스크림이다. 당당하게 한국어가 적혀있는 한국 아이스크림. 기쁜 마음으로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영화를 봤다.
영화도 다 보고, 창밖 풍경도 봤다가 잠도 잤다가 노래도 들었다가 혼자 지루하게 보내는 중에 두 번째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두 번째는 고기 산적 요리로 선택했다. 이건 실패할 수 없는 메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내식을 받아 들고 뚜껑을 오픈하는 순간, 3초간 정적이 흘렀다.
흰쌀밥에 고기산적 3덩어리. 전부다. 그래도 일단 한입을 해봤는데 다행히 이건 먹을만했다. 도시락 반찬으로 사들고 다니던 그 맛이 났다. 그것보다 조금 더 짜긴 했지만 처음 먹었던 기내식에 비해 맛은 있었기에 나름 배부르게 먹었다. 그래도 제일 맛있었던 것은, 후식으로 나온 '오예스'였다.
9시간을 버티고 나니, 곧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한다고 방송이 나왔다. 시계를 보니 환승까지 약 2시간 정도 남았다. 출발이 1시간 정도 지연이 되었는데, 딱히 서두를 필요 없이 환승 수속 밟고 면세점 구경하다 보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물론 캐리어에 대한 걱정은 계속되었지만..
모스크바 D 터미널에 내려줬는데, F 터미널에서 환승을 하라고 한다. 그런데 예상 소요시간이 25분이라고 한다. 그것도 걸어서. 트램이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다. 무작정 짐을 들고 걸어가야 한다.
중간에 짐 검사랑 환승 게이트까지 걸어가는 시간 포함하면 1시간이 무의미하게 소요되는 셈이다. 땅이 넓다고 공항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넓게 지었나란 생각이 들었다. 또 이동하는 내내 지겹도록 술을 파는 매장들을 봤다.
이 공항에는 술만 파는 것 같다. 10미터마다 보드카를 팔고 있는데, 술 말고는 팔게 없는 나라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D 터미널에서 F 터미널까지 25분간 캐리어를 끌며 트래킹을 하고 나서 드디어 환승 게이트에 도착했다.
장시간 앉아있다가 또 내려서 한참을 걷다 보니 힘들어서 게이트 앞에서 앉아서 기다리는데 술 취한 외국인이 팔을 잡으며 술주정을 한다. 스위스 한번 가기 너무 힘들다. 무시하고 있는데, 계속 치근덕거린다. 갑자기 일어나서 나를 껴앉더니 'I Love You' 이런다. 술 취한 남자한테 고백도 다 받아보고, 정이 넘치는 나라인가 보다.
혹시나 이상하게 엮일까 봐 자리를 피해 주변을 구경하다가, 술만 파는 공항 덕에 다시 멍하게 있으면서 환승 게이트가 오픈되길 기다렸다.
보딩 시간이 되어, 빨리 기내로 들어가서 짐을 싣고 푹 쉬기로 했다. 3시간 정도만 가면 되기 때문에 9시간을 날아온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에서도 한번 더 기내식이 제공되는데, 이미 두 번 당했기 때문에 큰 기대 없이 받았고 역시나란 생각이 들었다.
메인 부분만 조금 먹고, 샐러드에 올리브유 드레싱과 후추를 뿌려 참치랑 적당히 먹고 말았다. 웬만하면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음식을 대부분 다 먹는 편인데, 이때까지 남긴 적이 딱 한번 있었다. 인도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내에서다. 인도식으로 제공된 음식이 정말 정말 입에 안 맞았다.
그런데, 아에로플로트에서 제공된 기내식을 먹으니 순간 인도에서 돌아올 때 먹었던 그 기내식 맛이 생각났다. 덕분에 인도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면서, 잠시나마 인도 생각을 했다. 스위스 가는 길에 인도 생각을 하게 해 준 아에로플로트의 기내식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멍하게 시간을 때우며, 드디어 취리히 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에 내려서 트램을 타고 터미널로 이동을 했다. 모스크바 공항처럼 잔인하게 걸으라고는 안 했다. 모스크바 공항은 정말 트램이 필요한 곳이다.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입국 수속을 밟으러 갔다. 간단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수화물을 받으러 갔다. 캐리어가 하나하나씩 나오는데, 내 캐리어가 보였다. 저거다! 하면서 가는데, 다른 사람이 집는다. 앞에 가서 보니, 나랑 똑같은 캐리어를 가지고 온 여행객이었다. 설마란 생각이 들 때 바로 뒤따라서 나의 캐리어도 반갑게 나와주었다.
다행히, 출발 전부터 걱정했단 캐리어 분실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이다를 마신 기분으로 취리히에 예약한 숙소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이동했다.
공항에서 취리히 중앙역까지 기차로 10분 정도 소요될 만큼 짧게 걸린다. 티켓팅을 하고 기차 타러 내려갔으나 플랫폼을 잘못 들어서는 바람에 약간 헤맸지만, 친절한 외국인 덕분에 다시 플랫폼을 제대로 찾아서 기차를 탔다.
그리고 드디어, 목적지인 취리히 중앙역에 도착했다.
공항에 저녁 9시까지 유심을 살 수 있는 'Salt' 통신사가 있었지만, 난 9시 넘어서 도착했기 때문에 인터넷이 안 되는 폰으로 숙소를 찾아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국에서 구글 지도를 스위스 부분만 다운로드하여왔기 때문에 다행히 GPS 신호로 숙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역 근처에 있어서 길만 건너면 되었기 때문에 금방이었다. 숙소가 가까우니 와이프가 좋아한다. 피곤한데 잘되었다고.
체크인하고 그대로 쉬기엔 아쉬워서 호텔 바로 앞에서 간단히 맥주 한잔 하기로 했다. 눈에 보이는 곳에 바로 앉아서 메뉴판을 받았는데 소문대로 물가가 사악하다. 맥주 한잔에 5~7천 원은 잡아야 했다. 안주 가격도 기본 만원은 넘어갔다.
맥주 두병과 발사믹 소스를 곁들인 파마산 치즈를 주문했다. 한국에서 파마산 치즈는 비싼데, 여기에선 덩어리째로 막 퍼줘서 가격 대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즈를 좋아하는 와이프는 신이 나서 맥주와 치즈로 간단히 여행의 첫날밤을 즐겼다.
스위스 여행이 맥주 한잔으로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맥주를 마시며, 그냥 들어가기 아쉽다는 얘기를 하며 주변에 강이 있으니까 한번 둘러보고 들어가자고 했다. 취리히 중앙역을 따라 리마트 강까지 천천히 걸으며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취리히의 야경을 감상했다. 생각해보니, 여행 일정 중에 취리히는 오늘 하루만 머물기 때문에 야경을 볼 수 있는 시간은 지금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아쉽기도 해서 천천히 걸으며 가만히 바라보기도 하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강바람도 느끼면서 처음이자 마지막 취리히 밤을 즐겼다.
취리히의 밤은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에서 봤을 법한 유럽의 전형적인 야경이었다. 여기가 취리히구나, 드디어 내가 스위스에 첫발을 내디뎠구나란 생각과 함께 내일을 위해 숙소로 들어와서 하루를 마무리 지었다.
출발 전에 한국에서 봤던 스위스 날씨 어플에서는 비가 오고 흐리다고 되어있었지만, 내가 도착했을 때 스위스 하늘은 푸른 하늘에 일몰이 지면서 한쪽은 붉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밤이 되었을 땐,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나를 맞이해줘서 이번 여행에 대한 큰 기대감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