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울에 살며 북촌 인근에서 일을 하는 작가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짧게 떠난 여행에 관한 기록입니다. 늘 익숙하게 지나던 거리와 풍경들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여행기가 작성된 시기는 2019년입니다. 초고 상태로 저장해뒀던 이야기를 끝맺기 위해 2021년에 발간했습니다.
아침부터 날이 조금 흐리긴 했지만,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새벽에 추워서 잠이 깰 정도라 이부자리도 슬슬 바꿔야겠다. 지난번 한 바퀴 둘러보았던 한옥마을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은 꼭두랑 한옥과 직물 체험관엘 가볼 생각이다.
나와서 걸으니 간간이 시원한 바람이 분다. 삼청동 큰길로 이어지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어느 집에선가 느릿느릿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온다. 땀을 식히려 잠시 그 집 처마 밑에 서서 지금 저 건반을 치고 있을 사람에 대해 상상해본다. 바람이 금세 땀을 식혀준다.
삼청동 골목길엔 언제나 낡음과 새로움이 공존한다. photo by_윤씨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가 뜻밖의 유적을 발견했다. '복정'이라는 이 우물터는 조선시대에 궁중에서만 사용한 우물이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일반인들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대보름에는 이 물로 밥을 지어먹으면 일 년 내내 행운이 따른다고 하여 북촌 사람들도 우물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길 가다 만난 복정 우물터. photo by_윤씨
역시 궁궐 바로 옆의 동네였던 데다 아직까지 그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는 북촌이라, 곳곳에서 이런 유물들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다. 우물터를 만난 반가움을 사진으로 남겨두고 다시 걸음을 옮긴다.
한옥마을은 벌써부터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는 게 여행의 묘미인 것 같다.
오래된 주택과 멀리 보이는 궁궐 사이에 목욕탕 굴뚝이 보인다. photo by_윤씨
나는 이런 풍경이 정말 좋다. 담장 밑에 늘어놓은 화분들, 아직 채 지하에 묻히지 못한 전선과 그를 버텨주는 전신주, 열린 마당과 거기 심긴 초록들. 물론 여기 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언덕은 너무 가파르고 길은 너무 좁다. 집들은 다닥다닥 붙어있다. 이런 풍경을 낭만으로 느낄 수 있는 것도 잠시 스쳐 지나갈 뿐인 여행자의 특권일 것이다.
북촌 한옥마을의 골목길 풍경이 여행자의 눈에는 정겹기만 하다. photo by_윤씨
문득 그리스 산토리니의 하얗고 파란 주택들,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의 벽돌색 구시가지가 떠오른다. 그곳의 삶도 여기만큼이나 불편하겠지 생각하니 새삼 그 풍경이 바래는 느낌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은 사이 꼭두랑에 도착했는데, 이런. 사라졌다. 분명 여기가 꼭두랑 한옥이 맞는데, 사진으로 봤던 간판은 사라지고 어렵게 찾은 연락처는 없는 번호란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릴없이 발걸음을 돌린다.
꼭두랑 한옥이 있어야 했던 자리. photo by_윤씨
한복을 차려입고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사이를 빠져나와 직물놀이공방을 찾아갔다. 다행히 직물놀이공방은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곳은 아직도 전통방식대로 직기로 직접 직물을 짜는 곳이다. 판매도 하고 강의도 한다.
아담한 한옥에 차려진 직물놀이공방. photo by_윤씨
판매하는 상품의 종류가 다양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품질은 내 눈에 충분히 훌륭해 보였다. 여행지에서 기념품을 산다면 기념품 가게의 열쇠고리나 마그넷이 아니라 이런 것이었으면 싶은 그런 물건이었다. 반대로 한국을 찾은 손님이 있다면 집으로 돌아갈 때 손에 꼭 들려서 보내고 싶은 물건이기도 했다.
한국적이면서도 실용적이고 아름다웠던 직물들. photo by_윤씨
여름용으로 엉성하게 짜 놓은 발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기념으로 간직하기에는 가격이 상당했다. 그다음으로 눈길을 끈 것은 매트들이었다. 처음에는 욕실 앞 매트로 쓸 것을 찾았다. 그러나 여러 매트를 펼쳐보고는 완전히 다른 용도로 쓸 만한 매트를 골랐다. 모가 섞여 포근하고 색상도 왠지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매트였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벽에 간단히 걸어만 놔도 집안 분위기가 확 달라질 것 같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손에 넣은 덕분에 꼭두랑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를 훌훌 털어버리고 한층 가벼운 마음으로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잊어버린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우리가 잊어버리고, 찾지 않았을 뿐이다. 직물공방은 버텼고, 꼭두랑은 어쩌면 버티지 못했다. 우리가 잊어버린 채 지냈던 그 세월 동안 누군가는 잊지 않고 지켜내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새삼 우리 것을 묵묵히 지켜온 이들에게 경외심을 느끼며 오늘의 여행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