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은 어디가 좋을까?

북촌 여행 첫째날, 국립현대미술관(MOMA) 서울관

by 어슬

첫째날, 국립현대미술관(MOMA) 서울관을 가다.

이 글은 서울에 살며 북촌 인근에서 일을 하는 작가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짧게 떠난 여행에 관한 기록입니다. 늘 익숙하게 지나던 거리와 풍경들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첫 번째 여행지, 국립현대미술관


첫 번째 여행지를 결정하면서 고민이 많이 됐다. 북촌 한가운데를 손가락으로 찍어볼까, 한옥마을을 먼저 가봐야 할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으로 먼저 갈까, 수많은 기준들이 떠올랐지만 결국 국립현대미술관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먼저 날씨가 너무 더웠다. 높은 습도와 살인적인 무더위가 더해져서 사실상 날씨는 관광하기에 최악이었다. 실내 관광이 절실했다. (이 동네에서 일하며 알게 된 사실인데, 한국은 관광하기 좋은 날씨가 일 년에 몇 달 없는 나라다.)


게다가 현대미술관은 관광지로는 최고의 장소이다. 경복궁 오른쪽에 붙어있어서 찾기도 쉽고, 볼거리도 다양하고, 고풍스러운 건물과 매우 현대적인 건물들이 어우러져 북촌의 분위기를 대변해준다.


또 나는 평소 현대미술관 앞을 자주 오가면서 미술관 내의 식당도 종종 이용해왔지만, 정작 전시를 관람해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현대미술을 이해하기에 아직 부족한 안목 때문에 경외시 해왔던 것 같다.


여러 면에서 현대미술관은 내게 첫 번째 여행지로서의 의미가 충분했고, 또 결론적으로도 매우 만족스러웠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바라보는 위치와 방향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photo by_윤씨



현대미술관은 내게 낯선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늘상 지나다니며 바라보는 익숙한 풍경들 중 하나이다. 도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여유가 한껏 느껴지는 마당들, 복잡한 구조의 미로 같은 건물들, 이따금 찾게 되는 레스토랑 등 겉에서만 보아도 현대미술관은 매력적이다.

그런 공간을 오늘은 관광객의 입장에서 새롭게 둘러 예정이다. 며칠째 계속 비가 내려 눅진해진 공기를 헤치고 길을 나섰다.



차례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서울, 덕수궁 관. 출처_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역사를 담은 문화예술체험공간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 덕수궁, 서울, 청주 이렇게 총 4개 관이 있다. 1969년 경복궁에서 개관한 이후 1973년 덕수궁 석조전 동관으로 이전하였다가 1986년 현재의 과천 부지에 미술관을 새로 개관했다고 한다. 이후 1998년에는 덕수궁 석조전 서관을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인 덕수궁미술관으로 개관했고, 2013년에는 과거 국군기무사령부가 있었던 서울 종로구 소격동에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2018년에는 충청북도 청주시 옛 연초제조창을 재건축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를 차례로 개관했다.

그중 내가 찾은 이 곳은 경복궁 옆에 위치한 서울관이다. 서울관은 조선시대 종친부(종실 업무를 관리하던 관청)가 있던 자리이며, 후에 국군기무사령부가 들어섰던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과거에 역사적 상징성을 지닌 공간이었던 서울관은 지금은 서울시민들에게 도심 속 문화예술체험공간으로서 그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내부 벽면에 프린트된 안내도. photo by_윤씨



서울관은 여러 개의 건물이 복잡하게 이어져 있어, 밖에서도 안에서도 길을 헤매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구조를 한 번 파악해봤다.


건물은 전시동(A), 교육동(B), 아카이브동(C), 총 3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각의 건물 사이사이에 6개의 마당이 마련되어 있다. 관람객들은 거의 전시동을 이용할 텐데, 혹시라도 다른 입구로 들어오게 되면 내부에서 길을 헤맬 수 있으니 벽돌색 벽면을 가진 입구로 찾아오시길 권한다.



전시실 입구에 비치된 팸플릿. photo by_윤씨



전시동에 들어서면 티켓부스와 안내센터가 보이고, 티켓부스를 지나 전시실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이렇게 팸플릿이 꽂혀있다. 모든 팸플릿은 영문판이 함께 비치되어 있으며, 간단한 국립현대미술관 소개 책자와, 서울관뿐만 아니라 다른 두 전시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에 관한 책자도 구할 수 있다.



박서보, 그리고 아스거 욘


서울관에서는 세 가지 전시를 하고 있었다. 그중 박서보 전과 아스거 욘 전을 둘러봤다. 두 작가 모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인물이었다.


박서보 작가는 현대 한국의 추상미술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한다. 첫 번째 전시실에서 만난 그의 묘법 작품들은 현대미술에 대한 나의 전반적 인상과 다르지 않게 전혀 이해할 수 없어 당황스럽기만 했다. 다만 작가가 1960년대 후반 그렸다는, 팝아트의 영향을 받은 추상화는 한국에도 이런 작품이 있었나 싶어 나름 신선했다.



박서보 작가 전시작의 온도차.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한겨레



두 번째 전시의 주제인 아스거 욘은 덴마크 출신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라고 한다. 이번 전시회는 그의 사회, 정치적 활동과 작품 속에 묻어난 그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었다. 이 전시는 조금 더 회화적인 작품들이 많았고, 그만큼 더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아스거 욘의 포스터는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세련되고 감각적이었다. 저기 어디 홍대 담벼락에 그라피티로 그려져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스거 욘의 포스터. photo by_윤씨



첫 번째 여행을 마무리하며


길지 않은 점심시간에 둘러봐야 했기에 천천히 작품을 감상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지만, 곧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전시관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허기가 밀려왔다. 미술관 내의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식사로 첫날 일정을 마무리지었다.


첫날이었던 만큼, 마음은 바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순서도 제대로 정하지 못한 채 여정이 시작되었다. 괜히 허둥대고, 쫓기듯 종종걸음을 쳤다. 그래도 이렇게 첫 발을 떼고 나니, 앞으로 이 여행을 어떻게 구성해가야 할지 점점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오늘의 경험이 나름 흡족했던 이유는, 정말로 외국의 어느 미술관을 처음 방문한 여행 1일 차 관광객처럼 낯설고 서툴며, 모든 것이 새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여행자의 기분이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는 느껴졌다. 긴 여행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오늘의 일정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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