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갤러리들

북촌 여행 둘째날, 학고재와 프린트 베이커리

by 어슬


이 글은 서울에 살며 북촌 인근에서 일을 하는 작가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짧게 떠난 여행에 관한 기록입니다. 늘 익숙하게 지나던 거리와 풍경들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오랜만에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고, 오늘은 날씨가 화창하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적당한 습도와 뜨거운 태양, 진짜 서울의 여름 날씨다.


오늘은 학고재와 프린트 베이커리(print bakery), 이렇게 두 군데 갤러리를 둘러볼 예정이다. 두 곳 모두 지난번 방문했던 국립현대미술관과 지척이다.


사실 이 삼청동과 가회동 거리에는 갤러리들이 정말 밀집해있다. 점심시간에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눈길이 가는 가게에 잠시 들러 물건을 둘러보듯이, 그만큼이나 무심히 들어가서 당대 화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만끽할 갤러리들이 직장 근처에 이렇게나 많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엄청난 혜택이다. 왜 이런 혜택을 일 년이 넘도록 한 번도 누리지 못했는지 새삼 후회가 된다.



날이 좋아 더 선명하게 아름답던 학고재의 모습. photo by_윤씨



쨍하니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이 멋들어지게 찍힌 이 곳이 바로 학고재다. '한국고간찰연구회 20년 기념전'이 한창이었다. 전시회의 제목은 '옛 문인들의 편지'였다. 나는 고간찰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로 전시관에 입장했다. 당연히 전시에 대한 기대감은 낮았다. 아니, 없었다고 보는 게 맞다. 내가 학고재를 찾은 이유는, 그저 평소에 이 멋진 건물에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간찰이란 편지를 뜻하고, 고간찰은 오래된(옛사람들의) 편지라는 뜻이다. 한문이나 역사, 국문학 등에 조예가 깊지 않은 내게는 익숙하지 않은 주제였다. 첫 간찰 앞에 섰을 때만 해도 과연 내가 이 전시를 즐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우려가 무색하게 나는 곧 옛사람들의 편지 내용에 푹 빠져들었다. 200년이 넘은 손편지들이 이렇게 멀쩡하게 전해 내려와, 이 시대 사람들도 옛사람들의 편지를 읽으며 그 시절의 분위기와 지인 간의 애틋한 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 간찰들은 예술적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초서, 즉 영문의 필기체와 같이 흘려 쓴 글씨는 쓴이에 따라 독특한 개성을 지녔고, 특히 다산 정약용의 필체는 한문에 익숙지 않은 내가 보기에도 강하고 아름다웠다. 또 이 전시는 당대에 유행했던 시전지에 쓰인 편지들도 소개하고 있었는데, 시전지는 말하자면 문양이 새겨진 편지지이다. 이 시전지를 만들기 위해 식물이나 동물의 문양을 조각해서 종이에 찍어내는데, 그 만듦새가 퍽이나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고간찰연구회의 전시는 옛 것과 오늘의 것이 뒤엉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삼청동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더없이 좋은 전시 같았다. (그런 면에서 작품 설명이 외국어로 준비되어 있지 않은 점은 아쉬웠다.) 이런 전시를 만나게 된 것이 뜻밖의 행운으로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전시를 만났다면 도록 구입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photo by_윤씨



예상외로 전시가 흡족했기 때문에, 그냥 나가기엔 아쉬웠다. 고간찰연구회에서 이 전시에 사용된 간찰을 포함한 옛 문인들의 편지를 현대어로 해석해서 낸 책을 학고재에서 판매 중이었다. 책 한 권을 사들고 뿌듯한 마음으로 전시관을 빠져나왔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학고재의 신관이었다. 학고재에 신관이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오가며 발견하기엔 어려운 골목 안 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는 또 다른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프리뷰(Preview)'라는 제목을 단, 학고재 소속 작가 6인의 단체전이었다. 역시나 신관의 전시에 관람객이 더 많았다. 고간찰보다야 백번 접근하기 쉬운 현대 회화작품들이 걸려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인 소견으로, 그림은 그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가 너무 노골적이어도 보기 지루하고 너무 감추어져 있으면 당황스럽다. 그 사이에서 적당한 발란스를 이룬 작품이 마음에 쏙 들어오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는 첫 번째 전시가 두 번째 전시보다 흥미로웠다.


첫 번째 전시에서 예상외로 시간을 많이 보냈기 때문에, 학고재를 빠져나온 후엔 마음이 급해져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행선지는 프린트 베이커리, 학고재 바로 옆의 갤러리이다. 이 갤러리에 관심이 간 것은 바로 이 한 장의 그림 때문이었다.



눈에 쏙 들어왔던 전시회 포스터. photo by_윤씨



한눈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만큼이나 전시회의 제목도 매력적이었다. 한 번쯤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막상 갤러리에 들어서서 보게 된 작품과 그에 대한 해설은 아쉽기만 했다. 3개 층에 걸쳐서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은 마치, 한줄평에 "예고편이 전부"라고 쓰여있는 영화 같았다.


감각적으로 아름다워서, 넓은 집 한쪽 벽에 걸어두면 마실 온 손님이 집주인의 안목에 감탄할 만한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해설이 주장하는 '일필휘지에서 느낄 수 있는 기운생동'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충동구매의 욕구를 자극하는 프린트 베이커리의 소품샵. photo by_윤씨



그렇게 전시 관람을 마치고 나는 조금은 허탈한 마음으로 갤러리를 나섰다. 아쉬움을 달래려 갤러리 1층의 소품샵에서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눈요기를 했다.


사실 이 소품샵은 내가 프린트 베이커리를 둘째 날의 여행지로 선택하게 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삼청점을 포함해서 총 8개의 지점을 가지고 있는 프린트 베이커리는 '미술품 경매 브랜드'인데, 여기서 수많은 작가의 작품들을 디지털 판화본으로 구할 수 있다. 깔끔한 아크릴 액자로 제작되는 이 판화본은 마음에 드는 작품을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소장할 수 있게 해 준다.


소품샵에 문의한 바에 따르면, 모든 작품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에 온라인 샵에서 미리 컬렉션을 둘러보고 구입하고 싶은 작품을 이야기하면 며칠 내로 준비해서 직접 볼 수 있게 해주듯 했다. 다음에 꼭 내 방에 걸어둘 작품을 구입하러 다시 방문해야겠다 다짐하며 오늘의 여정을 마쳤다.



오늘의 일정 : 미술관 옆 갤러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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