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정치, 정치의 위기
윤석열 26.3, 이재명 25.9, 최재형 6.1. 8월 한 여론조사 기관에서 발표한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 결과이다. 단위는 퍼센트(%)다. 김동연 전 부총리도 얼마 전 출마 선언을 했다.
윤석열 - 전 검찰총장
이재명 - 현 경기도지사
최재형 - 전 감사원장
김동연 - 전 기획재정부 장관(경제부총리)
세 사람은 중앙행정기관장 출신이고 한 사람은 지방자치단체장이다. 네 사람 다 입법부(국회) 경력이 없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씨, 문재인 현 대통령까지 문민정부 이후로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자는 국회의원 경력이 있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당과 제1야당의 1등 대선주자가 모두 국회의원 경력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잠시 시계를 10여 년 전으로 돌려 재정위기 한가운데의 유럽으로 가보자.
2009년 10월 그리스 총선에서 기존 여당인 신민주당을 누르고 중도좌파 야당인 사회당이 승리하면서, 5년 반 만에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이 선거의 승리로 사회당의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재가 총리가 되었다. 정권 교체 이후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간 그리스 정부는 재정 적자를 매년 GDP의 4% 수준이라고 발표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13% 가까이 되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새 정부는 이 사실을 비밀로 간직하지 않았고, 그리스 국채의 신용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2010년 4월 23일, 그리스 정부가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면서 유럽 재정위기가 시작된다. EU와 IMF는 그리스 정부에 1,100억 유로를 투입하는 대신 그리스 정부에 허리띠를 바짝 조일 것을 요구했고, 국민들은 재정지출 감소와 세금 인상으로 고통받았으며, 전국적으로 파업과 시위가 발생했다.
문제는 그리스뿐이 아니었다. 그리스 국채를 많이 보유하고 있던 포르투갈과 포르투갈 국채를 많이 가지고 있던 스페인 등이 줄줄이 신용등급이 하락하면서 연쇄적으로 구제금융을 요청한다. EU와 유럽중앙은행(ECB), IMF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이들 정부가 채무불이행에 빠지지 않도록 도왔고, 그 후로 오랫동안 유럽은 경기침체에 시달렸다.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게 된 것은 공공부문의 비효율성과 뿌리 깊은 부정부패, 과다한 사회보장비 지출 같은, 그리스 정부에서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던 악습들 때문이었다. 그리스 이후 재정위기를 겪은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도 다르지 않았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정치권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기존 정치에 환멸을 느낀 국민들은 정치인을 버리고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들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에서는 3대째 연이어 총리를 배출한 정치 가문 출신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가 물러나고 임시 연합정부에 의해 ECB 부총재 출신인 루카스 파파데모스가 총리로 선출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3차례나 총리를 지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물러나고 EU 집행위원을 지낸 마리오 몬티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잠시 엿본 10년 전 유럽의 상황이 어떠한가? 수많은 정치인 후보들을 제치고 중앙행정기관장 출신 3인과 지방자치단체장 출신 1인 중 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겠다는 지금 한국의 상황이 10년 전 유럽과 비슷하지 않은가? 이쯤에서 기술관료제(테크노크라시)의 정의를 좀 더 알아보자.
테크노크라시(technocracy)는 그리스어 테크네(기술)와 크라토스(통치·권력)의 합성어다. 영어사전은 테크노크라시를 “①과학·기술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사회를 이끄는 시스템, ②전문가들로 꾸려진 정부, 특히 기술 전문가들에 의한 사회 운영”(메리엄 웹스터 영영사전)이라고 정의한다. 이 신조어는 1919년 미국의 윌리엄 스미스라는 엔지니어가 ‘기술: 산업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과 수단’이란 글에 선보이면서 널리 알려졌다. “사람들에 대한 지배(통치)가 공무원, 과학자, 엔지니어 등 전문가 집단을 통해 더욱 효율적이 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19세기 ‘혁명의 시대’가 저물고 20세기 ‘산업사회’가 오면서, 다양한 분야의 테크노크라트(전문 지식인)들이 공동체의 중요한 의사 결정과 집행에 결정적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공계뿐 아니라 환경, 보건·의료, 경제·경영, 외교·안보 등 정책 지향적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대개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테크노크라트 집단의 가장 큰 힘은 공동체가 그 전문성을 인정한 데서 나온다. 일종의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기대다.
- 한겨레, '[유레카] 테크노크라시의 명암', 조일준 기자(2016-10-05)
결국 기존 정치에 대한 실망과 불신, 기존 정치인들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을 것이라는 좌절과 포기가 우리로 하여금 기술관료를 선호하게 만드는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기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테크노크라시는 옳은 방향인가? 테크노크라시가 확대되었던 10년 전 유럽 상황에 대한 분석을 찾아보자.
본래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시기, 즉 “복잡하고 유동적인 세상”에는 더욱더 ‘세이프가드’(safeguard), 즉 사회안전망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특히 최근 선진국의 재정위기를 거치면서 이러한 안전망의 체계적인 후퇴에 대해 우려가 커지고 있다. 특히 그리스 등 남유럽 위기국에서 보듯이, 대중정치는 뒷전이고 이른바 금융시장의 위임을 받은 국제금융기구 출신의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들이 국가 행정과 정치를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고강도 긴축과 구조개혁의 충격이 서민층에 고스란히 응축되면서 부의 불평등은 물론 손실의 불평등마저 더욱 확대되고 있는 모습이다. 경제는 망가지고 서민들은 고용불안과 주거박탈 등 생계 위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도 흔히 ‘시스템 안정’에만 정책 에너지가 집중된 결과다.
- 한겨레, '‘위기의 일상화’ 경고…문제는 정치야, 멍청아!', 장보형 연구위원 (2012-11-04)
그렇다. 10년 전 유럽에서도 테크노크라시가 결국 해결책은 되어주지 못했다. 그때 남유럽 국가의 국민들이 일을 맡겼던 테크노크라트들은 결국 금융시장 종사자, 금융관료들이었고, 그들은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것보다는 금융시장과 중앙은행, 국제금융기구들이 손해보지 않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의 선택도 언젠가 결과로 그 옳고 그름이 증명될 것이다. 우리가 가장 집중해서 확인해야 할 것은 '과연 누가 국민의 삶을 정말 책임지고자 하는가'이다.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