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에세이 #12. 시간
오래전에 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자신이 죽고 난 이후에도 오래도록, 몇 세대가 흐르도록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 줄 만한 업적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나는, 내가 떠나면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의 부재에 슬퍼하는 게 싫다고 했다. 죽고 나면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리고, 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가 되었다. 이제는 자고 일어나서 얼굴에 눌린 자국이 생겨도 잘 펴지지 않고, 멍이 들어도 잘 사라지지 않는다. 매일매일 착실히 늙어가고 있다.
지금은 어떻게 나이들 것인가를 고민한다. 어떤 대단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심은 아직도 별로 없다. 평범한 보통사람으로 늙어갈 거라면, 너무 힘들게, 너무 고되게 살지 말고 행복하게, 즐겁게 살자고 다짐한다.
뒤돌아보면 정말 긴 시간을 이미 보낸 것 같은데, 아직도 내 앞에 그보다 더 긴 시간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사는 동안 해보고 싶은 일들을 다 하며 살기에 남은 시간이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기력이 있을 때 하고 싶은 일들을 마저 다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래서, 의미 없이 시간을 그저 보내버리고 싶지는 않다. 굳이 겪지 않아도 될 고통 속에 놓여있는 스스로에게 버티라고 강요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버텨서 그 오랜 시간의 끝에 내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 모든 노력이 너무나 쓸데없게만 느껴진다. 세상 떠나는 날 뒤돌아봤을 때 웃기고 신나고 뿌듯할만한 일들로 하루를 채우면서 살고 싶다.
지금도 역시 내가 떠난 걸 슬퍼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슬퍼할 나를 생각하면 더 가슴이 아프다. 가급적 내가 먼저 떠나는 게 좋겠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기억할 내 모습이 웃기고 신나고 뿌듯한 모습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