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에세이 #13. 식물
키우는 걸 좋아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안타깝게도 동물 털 알레르기가 심하다. 어려서는 거북이, 물고기 등을 키웠다. 다 크고 나서는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진지하게 키웠던 것은 로즈메리였다. 어느 날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사들고 왔던 허브 화분에 매번 늦지 않게 물을 주고 말을 걸어가며 애지중지 길렀다. 한 번씩 손으로 이파리를 쓸면 나는 향기에 감탄했다. 반려식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가 집을 비운 일주일 만에 로즈메리는 죽고 말았다. 나는 잠시 안타까워했고, 금방 잊었다.
취직을 하고는 사무실에서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삭막한 사무실에서 일만 하는 삶이 너무 팍팍해서 하나 둘 들여놓다 보니, 어느새 화분 둘 공간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잘라낸 가지에서 뿌리를 내려 동료들에게 분양을 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지만 그 화분들이 결국 모두 죽었을 때에도 나는 크게 상처 받지 않았다.
반려동물이 세상을 떴을 때 그들을 평생 돌봐온 가족들이 얼마나 슬퍼하는 지를 생각해보면, 키우던 식물의 죽음에 그렇게까지 슬퍼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신기하기조차 하다. 대규모 산불에 희생된 야생동물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높지만, 숲의 식물들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 슬퍼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식물의 생명은 동물의 생명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면 그저 우리가 동물이기 때문에 비슷한 개체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일까.
가끔 길가의 가로수를 보면서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대부분 은행나무이거나 벚나무이거나 플라타너스 나무인 그들은 사각으로 쳐진 울타리 안에 갇혀있다. 우리가 쳐 놓은 금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아마도 뿌리가 넓게 퍼져있을 구역 전체를 아스팔트가 뒤덮고 있다. 그래도 식물들은 말이 없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낼 뿐이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움직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그저 존재할 뿐인, 혹은 우리 눈에 그렇게 비치는 식물들은 우리 눈에 돌덩이와 다를 바 없어 보이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들의 죽음에 감정을 이입하고 슬퍼하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식물들도 엄연히 살아있다. 그들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치열하게 싸우고 경쟁하며 자기 자리를 지켜낸다. 길가의 풀 한 포기도, 집안의 화분 한 개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생명인 것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