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서울에 살며 북촌 인근에서 일을 하는 작가가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짧게 떠난 여행에 관한 기록입니다. 늘 익숙하게 지나던 거리와 풍경들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날이 조금 선선해졌다. 이제 주룩주룩 땀이 흐를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본격적으로 한옥마을을 구경하기로 했다. 검색을 해보니, 북촌8경이라고 개발해둔 관광코스가 있는 듯하다. 여행객답게 안내소에서 간단한 안내를 받아보기로 했다.
정독도서관 입구를 지나 언덕을 오르면 북촌마을안내소가 나온다. photo by_윤씨
한옥마을 투어의 시작, 북촌마을안내소
북촌마을안내소. 이름도 참 정겹다. 비가 많은 계절이라 밖에 내어놓은 우산꽂이마저 귀여웠다. 안에 들어가니, 직원분이 직접 나와서 반겨주신다. 행선지를 물으시길래 한옥마을에 가보려 한다고 말씀드렸다.
'북촌 8경이 있다던데요...' 내 말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으신다. 예전에 북촌의 관광명소 8곳을 그렇게 불렀는데, 이제는 더 이상 북촌 8경을 안내하지는 않으신단다. 북촌은 주민들이 거주하는 곳인데, 관광객들이 너무 몰려서 새벽부터 밤까지 시끄럽고 사생활 침해가 심하다고 한다. 북촌이 관광지로 유명해질수록, 피해를 입는 주민들의 민원이 심해져서 이제는 콕 집어 장소를 안내하는 게 조심스러운 모양이었다.
관광객 입장에서는 명소를 소개받는 게 여행에 큰 도움이 될 텐데, 그렇다고 매일 그곳에서 생활하는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불편을 감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 일이 아닌데도 상황이 참 안타까웠다.
더 이상 안내는 하지 않는다는 북촌8경. photo by_윤씨
그렇게 조심스러운 설명을 뒤로하고, 안내소 직원분이 지도를 펼쳐 북촌마을 길을 알려주신다. 골목길을 따라서 가회동 백인제 가옥을 먼저 가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큰길로 나와서 다시 돈미약국 골목으로 들어간 뒤, 거기부터 한 바퀴 주욱 돌아 나오면 된단다. 시간은, 한 바퀴 도는데 30분 정도면 될 거라 하셨다. 지도는 전에 받았던 것과 같은 지도이지만, 직접 펜으로 그려가며 길을 알려주셨기 때문에 그냥 받아 나왔다.
지도를 따라 첫 번째 장소로 발길을 옮긴다. 백인제 가옥. 처음 듣는 이름이다. '백인제'라는 사람의 집이었던 듯한데, 들어본 이름은 아니다. 사실 아름다운 한옥으로는 경북 청송의 송소고택도 보러 간 적이 있고 해서 크게 기대는 되지 않았다.
이 계단을 오를 때만 해도 기대는 크지 않았다. photo by_윤씨
이토록 아름다운 한옥
그냥 한옥마을 가는 길에 잠시 둘러보고 나와야지 생각했는데 웬걸...
도심 한가운데, 내 일터의 아주 가까이에, 이렇게 완벽하게 보존된 아름다운 고택이 개방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들어서는 순간, 서울이 아닌 어느 먼 고장의 문화유적을 보러 온 듯한 착각에 지금이 점심시간이라는 것도 잊고 마음이 들떴다.
잘 가꿔진 너른 정원과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가옥의 위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도성 안에서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집을 가꾸며 사는 삶을 잠시 상상해본다.
마음을 사로잡았던 사랑채와 정원의 풍경. photo by_윤씨
백인제 가옥은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한옥으로, 근대 한옥의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무려 2,460제곱미터(744평)의 대지 위에 사랑채를 중심으로 안채와 넓은 정원이 있고, 가장 높은 곳에는 단을 올린 아담한 별당채가 서있다. 전통적인 한옥의 건축양식이 근대적 변화(일본식 복도와 다다미방, 붉은 벽돌과 유리창 등이 차용되었으며, 안채의 일부는 2층으로 건축되었다)를 수용한 형태로, 건축 규모와 역사적 가치 면에서 북촌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남아있다.
백인제 선생은 마지막으로 이 집을 소유했던 사람으로, 당시(1944년경) 국내 의술계의 일인자였다고 한다. 백인제 선생과 그 가족이 오래도록 살던 이 집은 1977년에 서울특별시의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에 서울시로 소유권이 이전되어 2015년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백인제 가옥의 규모를 가늠하게 해주는 평면도
정원을 한 바퀴 돌아 안채 뒤쪽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에, 한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는 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온다. 가볍게 부는 바람에 단풍나무 잎과 가지가 부딪히는 소리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식혀준다. 그 찰나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뒷마당 한쪽에는 단을 쌓아 보관해두었던 장독이 그대로 남아있다. 장독은 그 자체로 살림의 흔적이라, 왠지 남의 집 안마당을 엿보는 기분이 든다. 툇마루 그늘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평면도를 살펴보니,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단숨에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곳은 사랑채와 그 앞의 넓은 정원이었다.
한동안 앉아서 땀을 식히고는 마당 뒤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별당채로 오른다. 이 집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그것도 단을 올려 지은 별당채는, 올라서서 내려다보면 북촌의 풍경이 한눈에 보일 것 같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별당채는 올라가 볼 수 없게 막혀 있었다.
안채의 뒷마당과 별당채의 모습. photo by_윤씨
사랑채 앞으로 돌아 나와서 중문간채를 지나 안채를 구경한다. 화려하고 아름답던 사랑채에 비해서 안채는 소박하고 단아해 보인다. 이 안에서 살림을 살고, 희로애락을 함께 했을 가족들의 삶을 잠시나마 그려본다. 그동안 보아왔던 전통한옥에 비해 넉넉한 실내 공간에, 근대 한옥의 건축양식 변화가 느껴져 흥미로웠다.
백인제 가옥을 나서며
백인제 가옥은 야간에도 문을 연다고 한다. 여행객이라면, 북촌에서 맞는 여름밤에 이런 전통가옥을 찾아 구경하는 것도 운치 있을 것 같다.
원래는 한옥마을을 한 바퀴 돌 생각이었지만, 백인제 가옥의 아름다움에 취해 너무 오래 머물렀다. 벌써 나의 짧은 점심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마음을 뺏길 만큼 좋은 것을 만났을 때에는, 여행의 일정을 바꾸게 되더라도 머무는 쪽을 택한다. 그 좋은 것을 그 마음 그대로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은 없으니까. 느낄 수 있을 때 마음껏 느껴보는 편이 좋다. 한옥마을 투어는 다음으로 미루고 다시 일터로 돌아간다.
오늘의 일정 : 가회동 백인제 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