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원주의(pluralism)와 상대주의(relativism)는 “절대적이며 유일한 진리 혹은 기준은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개인, 공동체, 상황에 따라 다양한 진리 혹은 기준이 존재한다.”라는 동일한 의미를 가지는 용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두 용어가 이와 같이 공통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용어가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분명히 다른 의미를 가질 경우가 있으므로 두 용어가 가지는 의미상의 차이점을 분명하게 정리해 두어야 용어 사용의 혼동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용어를 비교할 때 철학적 혹은 인식론적 차원에서 비교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학적 차원에서 비교할 것인지에 따라 그 설명이 달라질 수 있다. 그만큼 두 용어는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도덕적 다원주의(moral pluralism)와 도덕적 상대주의(moral relativism)으로 두 용어의 의미를 한정하여 비교하고자 한다.
먼저, 도덕적 상대주의란 어떤 도덕적 판단(행위)은 특정한 사회적 관습, 개인의 생각에 따라 옳은지 그른지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도덕적 판단(행위)의 진위여부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는 사회적 관습과 개인의 생각이 올바른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도덕적 상대주의자에게 어떤 도덕적 판단(행위)이 왜 올바른 것인지 묻는다면 “그런 판단을 내린 사람이 속한 사회적 관습을 비추어볼 때 올바르다.”라고 하거나, “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올바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반면, 도덕적 다원주의는 도덕적 상대주의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판단의 원리와 규칙이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다양성 속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도덕적 판단의 원리와 규칙이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다양성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무엇인가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공통적인 것이란 예를 들어 인간의 행복과 복지, 번영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적 진리가 존재하는가?”란 질문에 도덕적 상대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하는 데 반해, 도덕적 다원주의는 “존재한다.”라고 대답하게 되는 것이다.
도덕적 상대주의와 도덕적 다원주의를 이렇게 구분할 때 우리는 후자에서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이끌어낼 수 있다. 즉 도덕적 상대주의가 도덕적 다양성을 긍정하기 위해 절대 기준을 포기함으로써 결국에는 도덕적 회의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도덕적 다원주의는 상대주의와 마찬가지로 도덕적 다양성을 긍정하면서도 이러한 다양성이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도덕적 다원주의자는 자신과 다른 개인, 집단, 사회의 도덕적 판단 기준이 표면적으로는 자신과 다를지라도 결국 그 종국적인 목적에 있어서는 일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때 자신과 다른 도덕적 판단의 가치를 용인하고, 더 나아가 공존과 조화를 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도덕적 상대주의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도덕적 절대주의의 폐해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으로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즉 도덕적 상대주의자들은 유일하고 절대적인 도덕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러한 도덕이 인간의 정신과 삶을 억누르는 억압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며, 그리고 자신의 절대적인 도덕에 맞지 않는 개인과 집단에 대해서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내세운 논리상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비판정신 자체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결국 회의주의에 빠지고, 자신과 다른 도덕적 가치관을 가진 개인, 집단, 사회와 왜 공존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지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지 못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덕적 다원주의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즉 도덕적 다원주의는 도덕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상호공존의 틀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도덕적 상대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생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