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많이 오기 전에는 온몸이 쑤시고 아프기도 하고 어떤 관절은 너덜거리는 것처럼 아프기도 한다. 집안일 안 하는 편이라고 해도 직장도 다니고 개인적인 활동들도 하고 또 여러 가지 준비를 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창작가라는 타이틀을 만들어가면서도 주부이자 엄마인 것은 삭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즘 들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악장(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 (S.Rachmaninoff, Piano Concerto No.2)에 빠져드는 이유가 서정적인 선율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마치 순간순간 행복과 우울이 교차하며 초조한 스스로의 감정 같아 동화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지난 6개월 참 바빴다.
열심히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더 이상 열심히 사는 것은 없을 것 같았는데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던 것은 열심히 산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열심히 살았던 것 같다.
3개월 전부터 이명도 오고 어지러움과 두통 단순히 스트레스성이라 치부하기엔 여러 증상들이 많았다.
3주 전부터는 흉통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문득 내일 죽는다면 나는 어떨까 죽음이 두려운가에 대한 생각들도 해보았다. 미련한 생각 뒤에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내일 죽어도 아무렇지 않아.'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많지만 충분히 즐겁고 행복하고 나름의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보았다는 생각들이 미래에 대한 기대감보다는 매일의 행복이 주는 기쁨들에 펼쳐질 불확실한 행복보다 눈앞에 놓인 행복을 즐기는 것이 좋았기에 죽음이 내일, 또는 잠시뒤에 나를 찾아온다 해도 두렵지 않음에 만족했다.
아프다는 말을 꺼내니, 주변에서 걱정해 주고 아파해주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덕분에 병원진료를 받아보자는 생각으로 여러 병원을 고민하다가 지역에서는 큰 규모의 병원으로 향했다.
초진이라 반나절을 기다려 진료받고 매주마다 진행되는 검사와 검사결과를 보기 위해 3번의 방문을 했다.
처음 방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진행되었고 병원 진료를 받기 위한 환자라기보다는 오랜만에 보는 큰 병원이 너무도 신기해 두리번거리다 발견한 것은 심혈관 관련 질환자 대기실에 내 또래는 대부분 보호자였고 환자입장으로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는 심장 CT를 찍으며 만난 대기실 간호사들의 사무적인 태도는 당연한 것처럼 보였다. 심장 CT를 찍는 동안은 오히려 환자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 번째, 오늘은 심장초음파를 찍었다.
심장초음파, 예약시간보다 일찍 갔고 예약시간보다 일찍 준비했지만 원래 그런 것인지 제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심장초음파 찍는 과정이 아프다고는 했지만 처음이니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의료진의 요구대로 했다. 숨을 참았다가 쉬었다가 졸도할 만큼 숨을 참고 복부와 가슴을 누르는 압박감이 고통이라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진료라고 느끼며 참았다.
옆으로 모로 누워 벽면을 보고 있었기에 초음파실 내부에 의료진이 몇 명인지 어떤 사람들인지 잘 알지 못하고 찍는 과정에 닿는 사람의 온기로 인해 위안을 느끼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갔다.
중간중간 간호사들의 말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말에서 하루의 고단함이 느껴져 최대한 협조적으로 응하려 노력했다.
커튼너머 옆 초음파실의 환자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쯤 처음부터 초음파를 찍었던 의료진이 바뀌고 다른 분이 들어와 이전에 했던 것을 다시금 또 요구했다. 그렇게 끝나고 나니 60분이 훌쩍 넘었고 내 몸이 아프니 참자 참자 했던 마음은 더욱 불편해지고 이 병원에 내가 왜 왔을까를 생각해보게 했다.
심장초음파를 찍는 과정은 말 그대로 폭력적이었다. 의료보험공단의 건강검진을 위한 유방암촬영보다 더욱 굴욕적이었던 것 같다.
가슴을 누르고 자세를 바꾸고 명치를 누르고 숨을 쉬고 멈춤을 반복하며...... 느낀 것은 굴욕이라기보다는 내가 통나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음파 측정을 위한 젤을 닦아주는 과정, 지금까지 초음파 받는 경험은 처음이 아니었음에도 너무도 굴욕적이며 같은 여자가 닦아주는데 그렇게 수치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래 내가 아프니, 약자다 참자.'
심장초음파를 찍고 나온 이후 완전 녹초가 되었고 심신이 지쳐버렸기에 의료카드를 간호사에게 제출하는 것이 늦어져 진료마저 마지막으로 보게 되었다. 의사와 상담시간 검진결과는 허무하게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대신 간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 문제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전 여기서 또 한 번 화가 났다.
아무 이상이 없는데 의사는 첫 진료 때 시술을 권했을까. 리도카인 알레르기와 켈로이드성 피부라고 밝히자 시술권유를 멈춘 의사, 만약 내가 보통의 환자였다면 받았겠지.
fernando zhiminaicela, 출처 픽사베이
내일 또다시 진료를 받으러 간다. 간수치 문제에 대해서 내과진료를 받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오늘의 일들 속에서 의료진에 대한 불신이 생겨버렸다.
정확히 오늘의 과정 속에 그 병원에 대한 신뢰가 깨져버렸다.
개인병원과 중 진료권이라는 병원 규모의 차이일까요?
환자가 넘쳐나는 곳이고 조금 더 전문적이기에 하루의 고단함 때문에 버거워 생긴 해프닝일까.
의료인들도 사람이며 감정노동자이고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다.
코로나시대에 의료인은 한 분 한 분이 정말 소중하다.
그들의 희생스러운 수고 덕분에 지금의 아늑한 우리가 있는 것이니깐.
그러나 오늘의 내가 느낀 감정들은 참 슬펐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초음파 대기실 앞에서 기다리는 동안 어떤 환자를 봤는데 젋은데도 여러 장치를 많이 달고 굉장히 힘겨워하더라. 젊으니깐 이해가 되지만 만약 내게 저런 일이 생긴다면 연명치료나 과한 진료는 거부할 수 있게 해 줘."
현실에선 인기드라마 속의 김사부나 차정숙 같은 의사는 만나기 힘든 것 같다.
샤워를 하며 가슴과 배에서 묻어나는 젤들은 참 굴욕적이었다. 물이 흐르는 몸 위에 통증, 멍은 없었지만 참 이상했다. 난 오늘 분명히 병원을 다녀온 것인데 치료를 위한 과정이 아니라 마치 강제적이고 무차별적인 폭력의 흔적 같은 찝찝함이었다.
앞으론 아파서 쓰러지기 전에는 병원진료를 안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병원을 다녀오면 여러 가지 감정들이 교차할 때가 있습니다.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또는 이 정도 아픈 게 다행이구나.
그런데 오늘의 상황들은 병원이 오히려 너무도 무섭게 느껴지고 출산 과정에 느꼈던 폭력적 행위 같았던 상황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때와 오늘 무엇이 다른가.
삶을 이어가기 위한 것이 병원이니 삶을 어떻게든 이어주면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요?
통증은 여전한데 정말 스트레스성이라면 생활습관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