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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석 Myste Lee Oct 01. 2016

배우는 것이
모든 것의 답이 되진 않는다.

이 시대의 멜랑콜리

뭐 이리도 학원들이 많은지, 학원 제국이라고 불려도 될 만큼, 우리 주변에 배우기 위한 기관인 학원들이 줄지어서 참으로 많다. 한 블록에 영어 학원이 3개씩, 4개씩 모여 있는 거 보면, 오랜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학구열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우리 곁에서 언제나 활활 타오른다. 


시대에 따라 이름만 바뀔 뿐, 우리는 끊임없이 배운다는 것에 메여 있다. 그리 좋지도 않은 머릿속에, 배움만이 생명줄인 것처럼 구슬땀을 흘려가며, 밤을 밝혀가며 힘겹게 싸워낸다. 그리고 우리가 얻는 것은 사실 지식이라기 보단, 타이틀에 가깝고, 배워서 남주는 일에 소홀하고 오히려 배워서 내 안에서 삭히는 일에 집중한다. 배우지 않으면 뒤쳐지는 것 같고, 모르면 무식해 보이고, 좋은 학교를 못 나오면 마치 인생의 낙오자로 점 찍 혀 버리는 순간에  우리는 늘 빛을 보기보단 어둠에 더 많이 직면하고 그게 또 익숙하다. 아직도 아침 이른 시간이면 졸리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성큼성큼 배움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대단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안타깝다’라는 생각도 든다. 지식이란 분명 쓰이고 나눠야 함에 있는데, 저 수많은 배움이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덩그러니 떠오른다. 그래도 우리는 배우지 못한 아쉬움, 그리고 새롭게 배워야 한다는 미련이 틈만 나면 꼼빡꼼빡 머리를 쳐든다. 배움은 필요하다. 그런데 배움의 끝은 도데체 어디란 말인가.


텅 빈, 나는 헬스클럽에 혼자 들어서는 것이 좋다.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나에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조금 뛰다가 보면 숨이 차 오르고, 땀이 여기저기 맺히기 시작하면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다. 온몸이 일어난다는 기분은 꽤 상쾌하고 좋다. 한 시간쯤 정신없이 운동을 하고 나면, 아려오는 근육통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고, 온몸이 젖은 상태에서 샤워장으로 들어갈 때는 사뭇 뿌듯하다. 그날도 그랬다. 제일 먼저 운동하러 들어섰고, 이어폰을 끼고 운동을 하고 있는데, 앳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클럽 안으로 들어왔다. ‘이 시간에 다른 사람도 오네’라며 의외의 눈길을 보냈다. 키는 작지만, 날씬했고, 코도 오뚝했고 쓰고 있는 안경을 보자니 똑 부러지는 성격 같았다. 공부도 꽤 잘해 보였다. 시간이 이제 막 7시를 넘기고 있었으니 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나와는 다르게 눈이 총명한 빛을 품고 있었다. 내심 부러웠다. 근데 잠시 후 나는 조금 안타까워졌다. 그 여학생은 러닝머신에 오르자마자, 자기 얼굴보다 큰 영어 단어집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러닝 머신 속도를 5에 맞추고 걸어가면서, 한 시간 동안 입으로 중얼거리며 단어를 외웠다. 무엇이 저 여학생을 이 이른 아침에, 운동을 하면서 단어를 외우게 만들었을까를 한참 고민했다. 토익 시험? 중간고사? 그도 아니면 그저 영어 공부? 학생들에게 많은 능력을 요구하는 세상이라지만, 운동을 하면서 공부를 하는 모습이 대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 조금 안타까웠다. 저 단어를 외우는 의미를 어디에 두고 있을까? 운동하는 시간 조차, 내주어야 하는 이유는 무었을까? 어떤 상황이 저 여학생을 자신의 얼굴보다 훨씬 크고 무거운 단어장을 러닝머신 위에 올려두게 했을까? 그 뒤로도 여러 번 나는 그 여학생을 운동하면서 만났다. 언제나 늘 다름없이 무거운 단어장을 겨드랑이에 끼고 러닝머신 위로 올라섰다. 


나는 학원을 참 많이 다녔다. 엄마 덕에 다양하게 배움의 문을 열수 있었다. 속셈학원, 미술학원, 속독 학원, 피아노 학원, 태권도, 합기도, 수영, 종합학원, 단과학원, 기타 등등. 너무나 많이 배워서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피아노 배울 때, 체르니 40번까지 갔지만, 내가 지금 칠 수 있는 곡명은 ‘학교종이 땡떙땡’이 전부다. 많은 것을 배웠지만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 배움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고, 배움을 통해 성장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배워놓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배움을 갈급한다. 배워야만 살아남을 거 같다. 이제 그만 배우고 배운 거를 써먹어야 하는데 여전히 배운다는 것에 메어 있다. 배움을 통해서 내가 성장할 수 있다고 믿고 있고, 배운 일만이 유일한 해답인 것처럼 또 뭘 ‘배우고 싶다’라는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산다. 나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다. 배움은 우리 인생에 참 좋은 약이지만, 오히려 독이 될 때도 있다. 



배움을 탐닉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한 학생들을 앞에 두고 교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셨다. 


“여러분은 배우기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그런데 배운다는 것은 결국 한쪽 길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배우는 일은 내 안에 무언가를 채워 넣는 일이다. 그것은 한 가지 단어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한 가지 주제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하나의 영역 전부를 나타내기도 한다. 배우는 일은, ‘결국 한 쪽길을 잃는 것과 같다’라는 교수님의 이야기는 틀리지 않았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들일 수록 우리는 다르게 배우는 방법을 잃게 된다. 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하나라도 더 배우고 외우고 이해하려고 애써왔던 시간 덕에, 나는 다른 걸 배울 시간을 잃게 된다. 배움이란 끝이 없어서, 물고 물리는 연속성을 지니는데, 이는 시간과 노력을 겸해야 하기 때문에 놓치는 것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의 영역, 하나의 단어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인지하고 이해하고 나면, 그것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우리는 박탈당한다. 배운 덕분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을 하고 나면, 차라리 안 배우는 게 나을 때도 있다. 어느샌가 내 머리속에 가득찬 편견, 그리고 바뀌지 않는 아집. 맞다라고 믿는 것들에 대한 치우쳐진 판단. 배워서 생각할 수 없어 진것들이 많아졌다. 


우리가 어릴 적, 

hi.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를 배우는 바람에 이것이 안부인사를 묻는 전부로 아는 것처럼. 안부를 묻는 인사가 저것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는 다른 안부인사에 대한 궁금증을 상실한다. 심지어 잘 쓰지도 않는 말을 꽤 오랫동안 배우고 익히고 외워왔다. 


배우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일까?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것에 쫓겨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배움에 끝은 존재할까? 정말 배워야만 사는 걸까?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인 것 같다. 심지어 시간이 없어 배움에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배워야 한다. 를 가슴속에 되새기며 힘들어한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할 때, 알 수 없는 두려움을 가진다. 배우지 못하면 모든 것이 정지할 것처럼. 뒤쳐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때로는 배우지 않았기에 우리가 더 강할 수도 있다.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엉뚱한 접근도 가능하다. 맹목적 배움은 때로 우리를 함정에 빠트린다.


세상을 바꾼 사람들은 사실 많이 배우지 않았다. 배우지 않았기에 그들의 생각이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 자유로운 생각들이 때론 세상 전체를 바꿔놓기도 했다. 배워야 한다면 진짜 나를 생각을 통해서 시작했으면 좋겠다. 맹목적 배움은, 우리의 시간을 좀 먹을 때가 많다. 배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에 메여버릴 필요는 없다. 배우지 않는다고 우리가 낙오자는 아니다. 


우리는 결코 멈춰 있지 않다. 아무것도 배우지 않아도, 눈을 뜨고 세상을 살아나간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성장하고 있다. 삶이 배움이다.


글_사진 이인석 (Myst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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