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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as Aug 15. 2023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프리랜서가 시간이 많다는 것은 일이 없다는 뜻이다. 나는 요즘 시간이 흘러넘친다. 

퇴사한 지 이제 9개월이 되었고 그간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한 보상으로 (열심히 살았음에 대한 증거는 두둑한 통장 잔고와 바꾼 집 계약서이다.) 방종하게 살아본 결과 내 삶에 하나도 득이 될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됐다. 이 결론은 조급함이나 불안함에서 온 것이 아니요, 저물어 가는 젊음을 그저 멍하니 흘려보내고 있는 것에 대한 미안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발은 점점 가늘어지고 모공은 넓어지고 살은 늘어져서 도통 올라붙지 않는다. 이렇게 몸은 탈락되고 있는 것 투성인데 그것을 대신해서 채워지는 무언가(가령 지식이나 지혜, 노련함, 경험, 관계 등과 같은) 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또 다른 보상심리가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보상은 순전히 내 노력으로 얻어야 한다.


요즘 나는 정신을 차리고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 듣는 것 등에 루틴을 만들기 위해 대단한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먼저 다시 먹기 시작했다. 귀찮아서 하루 한 끼 대충 때우던 것을 밥과 국, 반찬을 각기 다른 알맞은 그릇에 나누어 담고 차려먹기 시작했으며 최근엔 요리책을 사서 하나씩 따라 해 보는 중이다. 엊그제엔 무쇠솥까지 샀는데 밥 다 태우고 난리가 났다.


옷도 오래 입을 수 있을 만한 옷을 신중하게 골라 몇 벌 샀다. 얇은 면의 흰색 셔츠와 반바지 두 벌, 그리고 가을에 입을 성근 니트 한 벌. 대부분 무채색 또는 아이보리, 장식은 없으며 쉐입과 재질이 좋고 사이즈는 제일 작지만 몸에 붙지 않는 옷들이다. 취향을 알게 되니 옷을 고르는 데 많은 시간을 쓰지 않게 되어 좋다. 이번에 나름 놀라운 시도라고 한 것이 거의 10여 년 만에 반바지를 산 것인데 그 정도로 이번 여름이 더운 게 아닐까 싶다. 이렇게 산 옷들이 쌓이다 보면 나중엔 아무것도 사지 않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보는 것과 듣는 것은 늘 그렇듯 책과 영화다. 대신 루틴을 만들어 매일 한 시간씩 읽고, 아무리 피곤해도 기어이 영화 한 편씩은 보고 잔다. 그러다 보니 상당히 많은 양이 쌓였다. 이걸 학창 시절에 했다면 4년 내도록 장학금은 어렵지 않게 받았겠지.


평론집을 읽고 영화를 보다 보니 그동안 내 정서가 B급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보고 열광했던 영화들은 대부분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들에서 아주아주 살짝 벗어난 영화들이었고 평론집에 나온 영화들 중 내가 본 영화는 거의 없었다. 거기다 히치콕이니 트뤼포티 고다르니 너무 오래돼서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다시 봤는데 놀랍게도 처음 보는 영화가 대부분이지 않은가.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걔 중 네 멋대로 해라와 비브르 사 비 두 영화로 나의 영웅이 된 장뤽고다르의 다른 작품들은 그가 즐겨하는 각종 실험적인 컷들로 흐름을 무자비하게 끊어놓는 통에 굉장한 집중력과 정신적 노력이 필요했고 일주일은 생각해 봐야 겨우 그 뜻을 알 수 있을 만한 의미심장한 대사도 지나치게 많아 시끄럽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냥 이 아저씨는 말이 너무 많다. 아무래도 나는 작가주의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 보다. 영화계의 잠언가로 통하는 고다르, 고다르, 고다르. 그의 잠언이 영화의 90%를 차지하는 미치광이 피에로 관람을 마지막으로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고 아직 그의 후기작을 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 엘리멘탈로 심신을 달래야겠다.


그리고 생각나는 대로 글을 한 시간씩 쓴다. 내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로 글만큼 좋은 것이 없다. 내가 먹는 것, 내가 보는 것, 입는 것, 듣는 것 모두 타인의 욕망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려면 끊임없이 생각하고 쓰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삶은 유한하고 어쩌면 생의 반절밖에 남지 않은 지금의 시점에서 앞으로 있을 결정들은 나의 의지로 선택하고 책임지고 싶다. 삶을 조금이라도 주체적으로 살기 위해 어쩌면 이 시간이 꼭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완벽하게 살기 위함이 아니라 순도 높은 나로 살기 위한 방법, 그런 것에 대해 집요하게 생각하는 요즘이다.


아, 평일에 운동을 빠짐없이 한다. 30분 내리 달리기 후엔 내가 좀 멋있게 느껴진다.

포카칩 어니언 맛에 빠져있다. 이걸 먹지 않고는 단 하루도 견딜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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