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카페테리아’ 옆 주차박스엔 혼자 떠드는 TV를 두고 40대의 장 씨가 병든 닭 마냥 졸고 있다. 박스 앞에서 빗자루를 쥐고 골프 연습을 하고 있는 우석. 한가한 이른 오후 시간, 우석을 찾아온 재용이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고는 카페 안의 누군가에게 손짓을 하자 곧이어 앞치마를 두른 웨이트리스가 뒤를 힐끔거리며 나온다.
“왜, 또?”
“야. 이 살인적인 날씨에 오빠들이 이렇게 육수 빼고 있는데, 시원한 거 한 잔 안 주냐?”
“그런 것도 하나 못 얻어먹고 다니냐?”
둘이 주고받는 말투가 오래된 사이 같다. 하긴, 재용은 다혈질이긴 하지만 넉살이 좋고 무엇보다 호남형이라 근방의 알바들에겐 인기가 좋다.
“우리 건물 애들은 네 가지가 없어서.. 흐흐.“
“내 언제 한번 올라가서 오빠네 커피숍 애들 교육 좀 시켜야지 안 되겠어. 이 더운 날씨에 알아서 챙겨줘야지, 이것들이 꼭 여기까지 내려오게 만들고 말이야.”
웨이트리스의 말에 과장된 감격의 눈빛을 보내는 재용.
“넌 타고났어. 남자 사랑받을라고 태어난 여자야. 으이구~ 이쁜 것. 내가 찍어 둔 여자만 아니었어도 너부터 자빠트렸어야..”
“뭐? 자빠트려?”
웨이트리스가 제 볼을 꼬집으려는 재용의 정강이를 냅다 찬다.
“좀 일찍 오든가. 지금 사장님 있어서 안 돼.”
재용이 정강이를 감싸 쥐다 사장이 있다는 말에 얼른 들어가란 시늉을 한다.
그리고 잽싸게 자리를 피해 골프 연습 중인 우석에게로 간다.
“미친놈. 살살해라 허리 망가지겠다.”
“와? 들어온 차가 없나? 또 자리 비웠다꼬 석구 형한테 한소리 들을라꼬..”
“니넨 왜 이리 한가하냐? 우린 야간이 피크지만 니넨 지금 차 없으면 어떡할라고.”
“몰라. 갈수록 차는 줄어드는데도 우리 박스 장께선 저래 태평한데 내가 뭐 하러 고민하노? 잘하믄 월급이나 맞출까 걱정이데이.”
“그래서... 니는 빗자루만 휘두르면 돈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박세리 기둥서방 할라꼬?”
언제 깼는지 장 씨가 핀잔을 준다.
“이기 다 비즈니스라 안 합니까?”
“가지가지로 꼴값이다. 내가 이 박스 접기 전에 니 비즈니스 꼭 좀 보이도. 으잉?”
입술을 빼꼼 내미는 우석을 보고 재용이 얼른 화제를 돌려준다.
“다들 기집들 끼고 바다로 내뺐나 도로에 차가 없네. 커피숍은 지금이 한참 시간인데.”
“느그는 그래도 아직 할 만 하제?
“예. 뭐..”
“그 자리가 진짜 노른자라. 석구 그 아가 처음 여기 왔을 때 비닐 천막 하나치고 딸랑 커피숍 하나 잡고 시작했는데.. 많이 컸제.. 그 자리 잡을라꼬 애도 많이 썼데이. 내는 지금 저 놈아 월급 주기도 힘들다 아이가. 별로 주고 싶지도 않지만 서도..”
장 씨는 자신의 넋두리에 아랑곳 않고 골프연습에만 열중인 우석을 한심한 얼굴로 본다. 그때 재용이 건너편 인도로 뽐내듯 걸어가는 걸 본다. 우석의 스쿠터를 타고 쫓아간다. 순식간에 귀순 옆에 바짝 스쿠터를 들이대는 재용.
“야, 타!!”
재용이 오렌지족 흉내를 내놓고는 저 혼자 킥킥댄다. 그 꼴을 본 귀순은 냉랭한 눈으로 힐끔 보고는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간다
.
“야. 진짜 차 안 갖고 다닐 거야?”
“...”
“야, 귀순아!”
순간, 귀순이 멈춰 서서 표독스런 표정이 된다.
“너!!!!”
아차 싶은 재용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좋아. 잘됐네. 나도 할 말 있어. 따라와.”
표독스런 표정을 거두지 않은 귀순이 앞서 걸어간다.
순간을 모면하려고 괜히 할 말 있다고 했을 뿐인데, 귀순이 할 말이 있다니. 불안해진 재용이지만 귀순의 표정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라서 그저 의아한 표정으로 쫓아가는 수밖에 없다. 귀순은 바로 앞 레스토랑으로 올라가려 한다. 그런데 재용이 따라오지 않고 스쿠터를 탄 채 레스토랑을 올려다보고 있다. 뻔하다. 비싼 레스토랑이기 때문이다.
“올라와. 내가 낼 거니까.”
그제야 재용이 쭈뼛거리며 따라 올라간다.
레스토랑은 평범하게 꾸며졌다. 귀순이 눈에 잘 안 띄는 구석 자리로 가 앉는다. 재용이 따라와 앉자 귀순이 주위를 살핀다. 무거운 분위를 바꿔보려는 듯 재용이 말을 꺼내려하는데, 하필 웨이터가 나타나 메뉴판을 내민다. 하는 수없이 메뉴판을 펼치지만 재용은 눈만 껌뻑인다. 죄다 영어로 써 있으니 알아볼 수가 없다. 시간이 걸릴 듯하자 웨이터가 돌아서 가려한다.
“저기요. 카라멜 마끼야또에 휘핑 추가해 주시구요, 저지방우유로 해주세요.”
귀순이 아는 척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을 한다.
“예? 그게.. 죄송하지만 그건.. 저희는 그런 게 없는데요?”
“없어요? 왜요?”
“그거 스타벅스나 일반 커피숍 같은데 있는 건데.. 저희 메뉴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랬다. 귀순이 들어온 곳은 레스토랑이고 귀순도 레스토랑이란 곳은 처음이다.
“그럼, 아이스티는 있죠?”
“네.”
“그럼, 그걸루 두 잔 주세요.”
웨이터가 메뉴판을 받아 들고 사라지면 귀순은 민만함을 감추려 부러 뾰로통한 얼굴을 만든다.
“무슨 가게가 그런 것도 없어? 촌스럽게..”
“그러게..”
재용의 거들어 주지만 귀순은 냉랭한 표정이 될 뿐이다.
“할 말이 뭐야.”
“아.. 그게.. 야, 아까 그냥 장난친 거야. 뭘 그런 거 같고 도끼눈을 하고 그러냐?”
멋쩍어하는 재용을 보는 귀순의 눈에 한심함이 가득하다.
“난 장난 아냐.”
“아니, 뭐.. 그냥.. 그래! 올 추석 때 기왕이면 같이 내려가자고. 고향에..”
“뭐?...”
이제 귀순은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한다.
“같이 가면 좋잖아. 니네 부모님도 걱정 많이 하실 텐데.. 나랑 같이 일하는 거 아시면 맘도 놓일 테고..”
“야!!!”
귀순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주위 사람들이 힐끔거린다. 귀순이 아차 싶어 주위를 살피고는 화를 억누르며 담배를 꺼내 문다.
“너 언제부터 담배 폈냐?”
“그 구질구질한 고향얘긴 왜 꺼내. 엉? 내가 너 땜에 돌겠다. 야, 잘 들어. 너랑 나랑 어릴 때.. 잠깐. 어휴, 미치겠네. 야. 그땐 어릴 때였잖아. 고딩 때라고. 너 그걸 갖고 지금도 착각하고 있나 본데. 그건, 그냥.. 그때.. 아이, 씨... 어려서 잠깐 불장난한 거잖아.”
때마침 나타난 웨이터를 피해 말을 멈추는 귀순, 웨이터가 가니 다시 말을 잇는다.
“그게 벌써 언젠데.. 아직도 내가 너랑 무슨 관계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너 그렇게 순진한 애니?”
귀순의 진지한 표정과 말투, 그리고 그 내용에 재용은 이미 낯빛이 굳어졌다.
“...설마 너, 나 찾으러 서울 온 건 아니지?”
“...”
“나, 참 미치겠네. 나 있는 덴 어떻게 알고 빼박이가 됐냐?”
“야, 내가 너 있는 델 알고 간 게 아니라 니가 우리가 관리하는 건물에 들어왔잖아.?”
“...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그래서? 설마 너 있는 델 내가 알고 들어 간 걸로 착각한 거야? 만약 그렇다면 제발 정신 차려. 그건 우연일 뿐이야. 그리고 잘 들어. 난 이제 그때 그 귀순이가 아니야. 이름도 바꿀 거야. 그러니까 제발 나, 아는 척 좀 하지 마. 제발 부탁이야.”
재용이 귀순의 말에 피식 웃는다.
“그때 그 귀순이 아니면 어떤 귀순인데? 연예인 지망생 한 귀순?”
귀순은 화가 부아가 치밀지만 애써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여튼, 내 말 알아들었을 거야. 혹시 나중에라도.. 그니까 나중에 혹시라도 내가 얼굴이 알려지더라도 치사하게 옛날에 아는 사이었다느니 그런 짓 안 할 거라고 믿어. 넌 옛날에도 비겁한 거 싫어했잖아.”
“푸하하... 벌써 연예인 다 됐네.”
귀순은 더는 참지 못하겠어서 벌떡 일어난다.
“비웃든 말든 내 할 말은 다 했으니 알아들었을 걸로 믿고 먼저 갈 게. 아, 그리고 너도 먹고살려면 빨리 다른데 일자리 알아봐. 아마 곧 다른 사람이 거기 맡을 거야.”
귀순이 계산대로 가자 재용은 앞에 놓인 아이스티를 빨대로 먹먹히 빤다.
#20
제우스 주차장 앞 왕복 2차선이 차들로 꽉 막혀 있다. 좌우로 이어진 좁은 골목도 나오려는 차들과 들어가려는 차들로 엉켜있고 여기저기서 빵빵대는 경적소리로 인해 일대가 극심하게 혼잡하다. 건너편 극장 빌딩 한쪽 면 전체가 영화 포스터와 플래카드로 도배해 있다.
“실루엣” 천만관객 돌파기념 장동진, 이영희 팬 사인회.
석구가 몇 대 없는 휑한 주차장 앞에 서서 거리를 지켜보고 있고 재용은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다.
“형. 오늘 장사 종친 거 같은데 그냥 시마이 하자.”
“...”
“이래 갖구 차들이 들어오겠어? 고추도 오늘 일찍 문 닫는 다던데.”
“고추는 고추고. 이 건물 차들은 어떡하라고.”
석구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계속 거리를 보며 대꾸한다.
“지들이 알아서 대겠지. 이 건물 새끼들은 어차피 발렛비도 안 주는데..”
“니 월급 이 건물에서 나오는 거야. 다른 업소 차 받는 건 부수입이고.”
석구가 갑자기 화단에 놓인 종이 박스를 뜯기 시작한다.
“뭐 해?”
재용이 궁금해 묻지만 석구는 대꾸 없이 종이 박스에 뭔가를 적어 부욱하고 찢는다. 이내 한 손에 찢어진 종이 박스를, 한 손엔 야광 지시봉을 들고 도로로 나가 차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조금씩 차들 간격이 생기더니 드디어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연달아 재용 앞으로 들어오는 차량들. 재용은 덩달아 바빠졌다. 석구의 손에 들린 찢어진 종이박스엔 ‘극장차 바씀니다. 두 시간에 만원’이라고 적혔다.
어느새 주차장은 만 차가 된다. 그제야 화단에 나란히 앉는 석구와 재용.
“형은 북한에 떨궈나도 굶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도 여차하면 굶을 수 있어.”
“형. 어차피 이 건물에서 잘릴 거 고추만 끌고 가자. 유료 주차장이나 몇 자리 알아보고 차가 모자라면 쪼그만 업소 하나 더 잡구.”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형. 좀 덜 벌어도 그냥 편하게 일하자. 그년 이제 오픈하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플 텐데 언제까지 눈치 봐가면서 일할 거야?”
그제야 재용을 바라보는 석구의 인상이 험악해진다.
“너 내가 여기 흘러 들어와서 이 자리 잡으려구 얼마나 뺑이 쳤는지 알어?”
그랬다. 2년 전, 할 줄 아는 건 운전 밖에 없는 석구가 골목으로 흘러들어 온 석구는 반년 동안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이곳저곳 뛰어다니며 발렛 파킹을 해주며 생계를 꾸렸고, 그 주차실력과 성실함이 소문나 커피숍 하나 잡아 비닐 천막을 주차박스 삼아 생활을 한 지가 1년 전이다. 그리고 제법 큰 제우스 건물을 맡은 지가 반년전이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재용이 그래서 찔끔한다.
이때 터질 듯 살집을 검은 양복으로 가린 깍두기 사내 둘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다가온다.
“아야. 얼릉 차 빼라. 현기증 나 뒤지것다.”
“차번호가 몇 번이죠?”
“차번호? 거시기..”
제 차 번호도 모르고 주차된 차들을 둘러보는 꼴이 빌려 타고 온 차가 분명하다.
“그 뭐시냐. 그랜젼디. 깜장색.”
“그랜져가 한두 대에요? 차번호 모르시면 차를 내줄 수 없는데요?”
재용이 의심스런 눈초리로 말한다.
“뭐시여? 이 호로새끼가 누굴 도둑놈으로 아나.”
“혹시 빌려 타고 오셨어요?”
“아~ 그 자식 무지허게 깐죽대네. 그려. 빌려 타고 왔다, 이 자식아."
한 대 때릴 기세다.
어느새 차를 뺐는지 구혈 각 그랜져가 깍두기 앞에 멈춰 선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는 석구.
“손님. 차 나왔습니다.”
“아따. 눈치하나 빠르구마.”
칭찬을 하며 얼른 차에 올라타는 깍두기들. 재용이 가만있을 리 없다.
“그냥 가세요?”
“응? 아참, 주차비? 얼만데?”
“영화 보셨어요?”
“오락실 갔다 왔는데?”
재용이 벙찐 표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자 석구가 나선다.
“주차비는 됐구요. 발렛비만 주세요.”
“발리...뭐?”
석구는 체념한다.
“그냥 가세요.”
“어이. 땡큐! 수고!”
출발하는 차를 한심한 표정으로 보던 재용.
“저거 쟤들 차 맞어?”
“맞어.”
“진짜 귀신이네. 형은 그 많은 차 넘버를 어떻게 다 외워?”
“저건 외우기 쉽잖아?”
그제야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각 그랜져의 번호판을 다시 보는 재용, 피식 웃는다.
아니나 다를까 못 외울 수가 없는 넘버다.
‘광주 18 나 1004’
“형. 저거 대포차 아냐?”
“우리가 알바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