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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Mar 08. 2022

바둑이와 나 10화

복날

이산가족이 만난 잔치집이 된 그날 저녁.

아버지만 반가운 듯, 미안한 듯 알 수 없는 얼굴로 막걸리만 들이키셨는데, 난 그저 바둑이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땅 임자가 나타나 퇴거 명령을 해서 당장 이사를 해야 할 처지에 놓였던 것이다. 어머니께 그 소식을 듣고서도 난 새로 이사할 곳은 마당이 넓을까만 걱정했다. 바둑이 키울 데가 없다고 또 내치지는 않을까만 고민했던 것이다.      


일주일 뒤 우리는 짐을 쌌다.

아버지가 바둑이를 볼 때마다 동생이 생각났듯이, 난 지금도 6월 25일이 되면 어김없이 방송에 나오는 피난 장면을 볼 때마다 이날이 기억난다. 고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땅 주인에게 합의금을 물고 용달차를 부를 돈이 없어 리어카로 이삿짐을 나르던 그날이 말이다. 아버지가 앞에서 끌고 나와 누나가 뒤에서 밀고, 어머니는 머리에 이불 보따리를 이고 걷던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힘들어서가 아니라 골목대장이던 나를 비웃던 동네 또래들의 놀림과 시선 때문이다. 그간 구슬과 딱지를 갖다 바치느라 억울했던 놈들이야 골목 폭군이 사라지는 마당에 그럴 만도 했지만, 부잣집 자식이라 같이 어울리지도 않은 것들이 보낸 그 눈빛은 그때까지 본 적 없는 무척 낯선 것이었고 우리의 모습이 무척 비참한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해 주었다. 이후 난, 비슷한 동네에서 몇 년의 소년 시절을 통해 가난이 그 자체로 경멸의 이유가 될 수 있으며 가난의 진짜 의미를 알게 됐다.      


우리가 이사한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리어카를 밀어서 두 시간 거리니 걸어서는 삼십 분 거리도 안됐다.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이삿짐 정리가 끝난 날. 이삿날 아주 멀리 가는 줄 알고 까불었던 놈들에게 당장 달려가 응징을 해줄까 하다가 관두었다. 왠지 예전처럼 복수심이 일지 않았다. 학교에서 마주칠 걸 미처 예상 못한 멍청한 놈들에게도 복수 따윈 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아마 이 시기부터 누군가와 친해지려고 애쓰지 않게 된 것 같다. 나와 친해지려고 하는 상대든, 내가 관심이 가는 상대든, 모두에게 시큰둥해진 것도, 그동안 단어 뜻도 모르던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도 대략 이 무렵부터인 것 같다.      


민속촌.

사실, 나도 이사하는 동네 이름을 들었을 땐 리어카를 밀고 그곳까지 갈 생각에 아찔했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허구한 날 TV에 나오는, 경기도에 있는 그곳이 아니었다. 완벽한 시골 마을이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 한복판, 그곳에도 있었다. 더구나 용인 한국 민속촌은 모형이지만 청담동 민속촌이라 불렸던 그곳은 실제로 사람들이 마구 살고 있었다. 동네 야산과 야산 사이 움푹 파인 분지에 22가구가 하나로 이어진 슬레이트 지붕 아래 벽을 끼고 모여 살고 있던 것이다. 지붕만 슬레이트일 뿐 벽은 진흙으로 만들어져 있고 집 앞에는 작은 논과 밭까지 있어서 아파트와 연립주택에 둘러싸인 그 형상이 마치 시골 마을을 떼어다 도심 단지 안에 딱 심어 놓은 것 같았다. 디귿자로 이어진 집들 중안에 놓여있는 있는 우물과 펌프가 마을에 들어서면서부터 믿지 못하고 벌어진 내 눈에 대고 ‘얼른 와. 시골은 처음이지?’하고 말하고 있었다.      


동네 아저씨들에게 들은 바, 땅주인인 김씨 할아버지는 십 년 전부터 공무원들과 투기꾼, 심지어 자식들에게까지 땅을 팔라는 끈질긴 회유와 협박을 받았고 했다.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그 땅을 지켜내신 이유에 대해선 다들 마을 앞 공동묘지에 계신 그분의 부모님과 마을 운영 수익 때문이라고들 믿었지만, 그러나 내가 중학교를 마칠 무렵 할아버지께 직접 들은 바로는 오로지 갈 곳 없는 빈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입주민들에게 집세를 받지 않는 대신 자신의 논과 밭을 일구고 그 수확을 걷어가는 형태로 마을을 이끌었다. 내가 특이하게 여긴 부분은 누구도 김씨 할아버지에게 반기를 들지도 못할뿐더러 간혹 술 먹고 주정이라도 부린 이는 다음 날 두 배의 일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단지 묘지와 운영 수익 때문이라는 사람들은 대개 할아버지의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은 나머지 술 먹고 주정을 하다 쫓겨나거나 다음 날 두 배로 일하는 멍청한 어른들이어서 나는 더욱 할아버지의 주장을 믿었다. 머리가 커진 다음에야 그곳의 운영방식이 중세 시대 봉건 영주와 소작농과 비슷하다고 느꼈지만, 할아버지의 운영방식에 아버지조차 불만을 품었던 그때, 내가 끝까지 할아버지 편이었던 건, 김씨 할아버지가 우리 부족 마을 추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누구도 도전하지 못하는 카리스마가 그저 멋있었다.      


세상은 21세기를 향해 가고 있었건만,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가족은 여름이면 동네 아줌마들이 우물 주변에서 공동 목욕을 하고, 월하의 공동묘지 앞 푸세식 화장실 네 개를 22가구 50여 명이 나눠 쓰는 원시부족 마을로 이사했다. 누나가 경악하다 못해 기절하려고 하고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시집가겠다는 결심을 할 만큼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서 개를 키울 수 있는 마당, 게다가 논과 밭까지 있다는 사실은 다른 열악한 여건들을 다 씩씩하게 이겨 낼만큼 감사한 것들이었다. 딱 하나, 여름 화장실에서 콧구녕을 휴지로 틀어막지 않으면 암모니아 냄새에 기절을 한다는 것 빼고.      


논과 밭은 함께 일구고 어려움을 같이 나누며 이웃집 일이 내 일인, 그런 면에서 현대인들이 복구하고자 하는 공동체 마을 이건만, 내가 원시부족 마을이라 칭한 것은, 어느 부족이나 고유의 풍습과 전통이 있듯이 이곳에도 그게 있었다. 그냥 풍습이 아니라 아주 미개하고 야만적인 풍습. 그건 바로 복날 개 잡는 풍습이었다. 당시 개 잡는 풍습이야 듣기도 많이 들었고, 골목마다 보신탕집이 있어서 그리 특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은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생일은 넘겨도 복날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으며, 초복, 중복, 말복 꼬박꼬박 성실히 챙기는 데다 닭이나 오리는 취급도 안 하고 오로지 개만 잡았다. 매년 집마다 순번을 정해 놓고 순서대로 자기 집 개를 잡아먹는 것이 무슨 조상 제사 지내는 것만큼 엄격하고 질서 정연했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 집 순번이 되면 슬퍼하냐고? 천만에. 오히려 신나서 며칠 전부터 떠들고 다닌다. 본인 입장에선 일 년간 마을 사람들을 위해 제집 개를 얼마나 잘 먹여왔는지 보여주는 기회였다. 우리 식구가 정든 양지마을을 떠날 때만 해도 나는 새로운 동네 놈들은 휘어잡을 궁리를 하느라 여념 없었다. 그러나 이삿날 이후 난 골목대장 노릇에 흥미가 없어져 마음을 아예 책상으로 돌아 앉혔다. 그러나 바둑이는 알아서 골목 대빵이 될 줄 알았다. 우리 바둑이가 누군가? 우유와 마이신만으로 죽음을 이겨낸 ‘불사견’에다 무지막지한 개장수를 물어뜯고 삭막한 황야의 온갖 하이에나들을 물리치고 돌아온 '돌아온 장고’ 아닌가? 그런데 그곳에 와보니 이건 뭐, 집집마다 개새끼들 한두 마리씩은 기본인 데다 다들 뭘 먹였는지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더구나 마을 뒤 야산 밑자락엔 개 사육장이 있었는데, 일명 도사견들이 투견으로만 길러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십 수마리가 곳곳에 걸어 놓은 트럭 타이어가 다 너덜너덜할 정도로 이빨을 갈고 있던 것이다. 나는 민속촌에 살면서 투견장에 나갔다가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오는 놈들을 심심찮게 봤는데, 그때마다 바라본 우리 바둑이는 참... 곱게 큰 놈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지 바둑이도 그때마다 내 눈을 피해 먼 산만 보고 하품만 했다. 그러니 나름 산전수전 겪은 바둑이도 개 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개판인 동네에서 감히 크게 짖어 보지도 못하는 초라한 꼬붕견이었다. 집에 쌀통은 없어도 개는 다 있고, 바둑이 같은 전통(?)있는 개는 또 안 키우고 잡종에다 살 많고 기름진 개만 키우는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사한 그 해 초복 날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턱을 덜덜 떨며 확인한 날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동네 아저씨들 중 주로 백수인 사람들이 공터 한가운데 나무 말뚝을 세우고 밧줄로 올가미를 설치하는 둥 분주해서 설마 하고 지켜보다 학교마저 빼먹은 날이기도 했다. 그들 중 개 주인은 제집 개를 아침을 특별히 잘 먹였다고 했다. 일종의 제의라나? 원시 부족민다운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개 주인이 제집 개를 공터로 유인하는데, 한 사람은 고무로 된 자전거 튜브를 뒤춤에 감추고 살살 따라갔다. 이 고무 튜브의 용도가 사실 궁금했는데, 희한하게도 아무나 잘 따르던 멍청한 개도 유독 그날만큼은 주인의 말도 잘 따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그럴 때는 무작정 장정 두어 명이 달려들어 포박을 하는데 그러다 궁지에 몰린 개에게 물리기도 해서 주둥이를 묶기 위해 고무 튜브를 준비하는 거라고 했다. 그날 당첨된 개는 덩치가 무척 큰 숫놈이었는데, 어떤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순진하게 꼬리를 바람개비처럼 돌리며 공터 한가운데까지 쫄쫄 따라오는 녀석의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이 평소처럼 순한 놈이라고 칭찬하는 동안 나는 속으로 ‘멍청한 새끼’를 연발했다.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되어 주인이 먹을 걸 바닥에 던져주자 녀석은 먹어치우기 바빴다. 이때를 놓칠세라 옆에 섰던 장정의 야구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먹이가 던져지고 방망이가 휘둘러질 때까지 일련의 동작이 일말의 망설임 없는 찰나에 이뤄졌다. 그러나 호기심과 걱정이 뒤섞여 지켜보던 내가 정작 공포에 질린 건 그 이후였다. ‘퍽!’ 소리와 함께 고꾸라진 녀석이 잠시 꿈틀대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그 순간엔 나만 혼비백산한 게 아니었다. 덩치 큰 개가 미쳐 날뛰니 장정의 야구 방망이도 표적을 잃고 이리저리 날뛰었다. 그러니 개의 머리와 몸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 난타가 이어졌다. 덩치 값인지 녀석은 십여 차례를 더 얻어맞은 후 드러누워서도 눈동자를 굴렸다. 그제야 사방으로 흩어진 어른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거품 가득한 주둥이를 조심조심 고무 튜브로 묶던 한 아저씨가 말했다.       


“등신 새끼야. 대가리 하나 못 맞추냐?”     


그렇게 거품을 문 개의 주둥이를 묶고 나자 이번엔 식칼로 목을 그어 숨통을 마저 끊었다. 그렇게 비참하게 맞아 죽은 개는 말뚝에 걸린 밧줄에 매달리고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쌀가마니를 뒤집어쓴 채 불에 타는 동안에도 방망이 세례를 받았다. 구더기 가득한 쌀가마니가 털이 끄슬러져 잘 벗겨지게 하고 방망이질이 고기 맛을 연하게 한다는 둥 어쩐다는 둥 경력 많은 자의 자랑 섞인 수다를 들으면서 말이다. 아줌마들은 잔인하단 이유로 대개 이 과정에선 제외되지만, 막상 개가 고기가 된 후 공동 우물로 옮겨지면 아줌마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 사이로 털을 벗기고 부위를 나누는 칼이 현란한 춤을 춘다. 한쪽에선 갖은 양념을 만들며 서로에게 간을 보여주고 말이다. 앞 과정을 빼고 우물 풍경만 본다면 명절의 한 풍경과 다름없는 복날 축제인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부족 특유의 전통 의식이 있는데, 수컷의 경우 개 주인이 개의 정자 생성소를 먹는 것이 그것이다. 이때는 나이도 지위도 필요 없다. 오로지 개 주인이 임자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것을 생으로 먹는 개 주인의 얼굴에선 어떤 경외심마저 서려있고 그걸 또 바라보는 아줌마들의 눈빛은 야릇하게 반짝였다. 내가 그들의 얼굴과 눈빛에 흐르던 숭고한(?) 뜻을 어렴풋이나마 안 것은 프로야구 원년 구단 중 MBC 청룡의 백인천 감독이 광고했던 남성 정력제 ‘개브랄티’ 광고를 보고 나서였다. 유일무이한 4할 타자였던 백인천 감독은 프로야구 출범 다음 해에 기어이 간통죄로 감옥까지 갔으니, 그의 야구 실력에 기타 능력까지 덧씌워져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제품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그 제품의 유래가 여기 청담동 민속촌이라는 풍문은 그냥 풍문이 아니었단 말이다. 난 ‘개 패듯 팬다.’라는 말도 아마 이곳에서 시작됐을 거라고 믿는다.


아무튼, 이것이 아마존 밀림도 아니고 20세기 서울의 강남 한 복판에서 벌어진 풍경이었다.

그 야만의 시간에 우리 같은 애들은 뭘 했느냐면 아무것도 안 했다. 아니, 못했다. 그까짓 개 문제로 부모님께 대들었다 처 맞지 않고 버틴 건 그 동네에서 내가 유일했으니까. 그 시대에는, 특히 그 동네에서 개는 그저 개였다. 애완이니 반려니 하는 말도 없을 때였으니 복날 개가 죽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명화에 뒤처진 마을을 걱정하고 하루빨리 이런 야만적인 관습을 없애기 위한 대책 회의를 하기엔 우린 너무 어렸으므로 우린 개 주인이었던 아이 앞에 쫀디기를 펼쳐놓고 달고나를 휘저으며 한편으론 언제 우리 개가 순서가 될지를 손가락으로 꼽아보는 게 할 수 있는 것의 다였다. 그 해 여름이 다 갈 때까지 난 이 야만의 축제를 두 번이나 더 봐야 했고, 또다시 이삿짐을 쌀 때까지 허구한 날 우리 집 바둑이는 본래 맛없는 정통 개새끼에다 마이신을 하도 먹어서 고기가 고무 튜브보다 더 질길 거라고 은밀한 소문을 퍼트리고 다녀야 했다.      


꼴 보기 싫다고 바둑이를 팔았던 우리 아버지도 삼 년 후 우리 바둑이 차례가 왔을 때, 선뜻 제물로 바칠 만큼 미워하진 않았는지, 심장이 약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다음 해에 잡는 것으로 미뤄놓고는 그 해가 되자 동네에 똥 냄새나서 못살겠다며 엉뚱한 핑계를 동네방네에 떠들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버렸다. 공동묘지 앞 푸세식 화장실 때문에 기필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시집을 가겠다고 공언한 누나가 하필 중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이사를 했으니 아버지가 이사한 이유가 누나 때문이지 바둑이 때문이지는 나는 알 수 없으나, 땅을 덤으로 얹어준다 한들 아무도 안 데려갈 누나는 지금까지 자기 때문에 바둑이가 개고기 될 신세를 면했다고 믿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바둑이는 늙어서 죽었다. 바둑이가 죽기 몇 달 전,  그때도 반려동물이란 말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난 그 의미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퇴근길 대문 앞에 앉아 바둑이를 쓰다듬으시며 하신 말씀이 그 의미였다.

     

“이 집에서 날 반기는 놈은 너뿐이구나.”      


가난해서 외로웠던 내 유년시절부터 열등감이 지배했던 사춘기 시절까지, 바둑이는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내 옆에 있던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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