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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틱 Jul 21. 2024

영혼이 잠식될 때

글 귀신이 있긴 있나보다. 어딘가에서 읽은 얘긴데, 어설픈 글 실력으로 밤엔 쓰지 말라고 했다. 지나친 감성이 글 귀신을 불러 오글거릴 글이 나올 거라고 했다. 나 역시 지난 달 병원 중환자실에서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글 귀신이 붙었나 보았다. 온 몸이 불타는 오징어가 됐다. 변명하자면, 망가진 몸으로 사흘을 못 자 거의 정신이상 상태인데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침대 밖으로 발도 못 뻗게 하는 인신 구속 상황이었다. 낮엔 소음이라도 들렸지만 정적만 있는 밤은 정말이지 공포였다. 잠에 들지 못하고 꼬박 열 시간 이상을 하얀 천정과 벽만 바라보고 지새운다는 건 지독한 고문이었다. 열두시를 가리키는 시계바늘을 보고 앞으로 열 시간 동안은 간호사든 누구든 오겠지 했다가 밤 열두시라는 걸 알고는 얼마나 몸서리쳤는지. 유리문 밖으로 아무나 지나가기만 기다릴 정도였다. 간호사가 오면 어찌나 반가운지 제발 오래도록 피를 뽑아주길 바랐다. 능숙한 간호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주사기를 거뒀고 매정한 간호사는 전자식 혈압계 버튼만 누르고 사라졌다. 이대로 또 밤을 맞으면 미치고야 말 것 같아 간호사에게 종이와 펜을 부탁했다. 포스트잇과 볼펜을 주는 간호사에게 간절히 부탁해 A4 용지를 잔뜩 얻고는 펜 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막 휘갈겼다. 적막한 고통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쓴 용지가 사십여 장에 쓰레기 같은 짧은 글 아홉 편이었다. 간호사들이 뇌압이 높아지면 안 된다고 말렸지만 내 불면증을 아는 고참 간호사의 배려로 중환자실을 벗어날 때까지 종이와 펜을 동아줄처럼 부여잡고 버틸 수 있었다. 입원실로 옮기고 나서는 제대로 된 수면제가 처방돼 잠을 잘 수 있었지만 글 귀신이 붙었는지 깨어있는 시간엔 종일 노트북을 안고 살았다. 약에 해롱대고 글 귀신까지 붙으니 손가락이 미친 듯이 춤을 췄다. 뭘 얘기하려는지도 모르고 아무한테나 하소연 하듯 마구 지껄였다. 간병인 이모님이 소설가냐고 물었을 때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발행’을 다 누르고 난 뒤였다.     

 

퇴원 후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는 시간이었다. 제 정신이 들고 보니 쓴 글만 망한 게 아니었다. 운영하던 가게도 망했다. 그럼에도 살긴 살아야 하기에 밑바닥부터 이것저것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는 길목마다 해결 못할 장애가 가로막았고 내가 널리 씨 뿌린 과거가 무럭무럭 자라 거대한 가지로 발목을 휘어잡았다. 주저앉았다가 다시 시도하고 다시 주저앉았다. 의지가 다 소모됐다. 심리적 근육이 굳어 좀체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 했던가? 개뿔. 의지가 안 생기는데 무슨 수로 낙관한단 말인가? 차라리 버텨서 무슨 수가 생길 거라면 낙관하겠다. 버틸 힘이 없는데? 


숨이 막힐 것 같아 병원에서 쓴 쓰레기들을 들췄다. 어떤 장은 구겨서 버리고 어떤 장은 하도 민망해서 북북 찢어 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한 장의 글이 눈을 사로잡았다.  

      

오전 열 시. 따스한 햇살에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마음이 충만해진다. 뭔가 그럴싸한 삶을 사는 기분이다. 이제 아점을 먹고 샤워를 한다. 몸과 마음이 개운한 상태로 명상을 시작한다, 의기충천한 마음으로 작은 일터로 향한다. 작은 일이지만 그 일이 내 장기적 목표에 큰 도움이 되며 삶에 활력이 되기에 소중하다. 일을 마치고 가뿐한 마음으로 귀가해 저녁식사를 마치고 공원을 뛰며 운동을 한다. 뭔가 나를 꽉 채우는 느낌이 발끝에서 전해진다. 저녁 샤워를 마치고 다시 명상을 한다. 이제 오늘 해야 할 일을 모두 성공적으로 마쳤다. 가슴이 뿌듯하다. 더 나은 나를 위해 한 걸음 더 다가선 느낌이다. 이제 잠들기 전까지 가장 자유롭고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다. 컴퓨터를 켜고 무엇이라도 쓴다, 어떨 땐 내가 놀랄만한 글이 써지기도 한다. 이런 습관을 몇 년 만 유지하면 작은 책 하나 낼 수도 있겠다. 크크.. 새벽 네 시. 이젠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든다. 하루를 충만하게 보냈으니 어떤 후회나 두려움이 없어 수면제 없이 잠이 든다.      


어느 날 아침엔 화장실에 앉아 무거운 눈을 껌뻑거리며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러고 있나. 과연 내 삶은 달라질까.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는 자기도취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불현듯 닥친다. 그런 날 그 감정에 매몰되면 여지없이 하루가 망가진다. 아무리 따져도 답이 안 나오는 문제를 풀려고 에너지를 쏟다보면 어느새 불안이 영혼을 잠식해 있다. 그날이 며칠이 되고 그 며칠 동안 난 몸도 마음도 망가져 간다. 어차피 답을 못 찾을 거면 당장의 하루를 내 루틴대로 충만하게 사는 게 가장 ‘현실적’이라는 뻔 한 결론을 다시 내린다. 이내 지난 며칠을 후회하고 아쉬워한다.     


응? 이건 누가 쓴 거지? 필체는 분명 내 건데? 다른 누가 내 악필을 흉내 내 썼을까 싶을 만큼 기억에 없는 글이었다. 벤조디아제핀 계열 약을 24시간 맞은 부작용인가? 아니면 글 귀신이 썼나? 아니면 어디서 읽은 글을 썼나? 왜 썼는지 모를 이 짧은 글에는 내 과거와 미래가 그리고 내 바람까지 선명하게 다 들어 있었다.       


무지 노력하면 짧은 기간 안에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착각. 

노력이 모든 걸 결정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90년 대, 이십대 때의 내 모습이었다.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일어난다면 그건 행운이거나 그 정도로 노력만 해도 일어날 일이다. 늦게라도 현실 감각이 트였던 삼십대 때의 내 깨달음이었다. 

     

미래에 지금을 저당 잡히지 말자. 노력만으론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할 바엔, 어차피 운이 지배한다면 노력이고 뭐고 되는 대로 살자는 나태함. 사십대 때의 내 태도였다.  

    

어쩌면 그때까지는 운이 좋아 약간의 재능에 타고난 집중력을 발휘해서 먹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운을 갉아 먹는지 언젠가부터 그런 운도 따르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삶에 대한 관념과 태도를 바꿔야 했으므로 진지한 고민에 빠졌었다. 자꾸만 바뀌는 내 삶의 태도를 혐오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보다 다른 차원의 진리를 깨달은 건 오십이 넘어서였다. 그 진리란, 바라는 일의 대부분은 오랜 시간과 지속적인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매우 초딩적이고 무척 단순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하루 변하지 않는 루틴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실천한 건 몇 년 전부터였다. 중년이 한참 되어서야 남들 다 하는 실천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실천은 번번이 불안으로 인해 중단되기 일쑤였고 난 나락으로 떨어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내가 종이에 휘갈긴 이 글은 과거의 내가 불안에 매몰돼 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나를 예견하고 있었다. 지난 며칠도 분명 그랬다. 내게 예지력이 있다니. 습관처럼 자기도취에 빠지는 나도 이번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없다는 각성만 있었다. 돈벌이야 그때도 살려고 발버둥치면 어떻게든 생겼었다. 문제는 문득문득 닥치는 불안에 매몰되는 나를 방치하는 나였다. 우울증처럼 어느 순간 내 정신을 제어 못하기 전에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데, 그 순간을 놓치면 아쉬워하기도 전에 일상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난 왜 바닥을 쳐야 다시 일어날까? 모 아니면 도인 성격 탓인가? 툭하면 바닥을 치니 이제 바닥이 안 무서워서인가? 이제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것 같지만 인생이 유한하다는 것과 지난 시간의 소중함을 생각하면 원점이 아니다. 억울하다.’ 


지난 며칠 동안도 이 따위 후회와 자기혐오가 내 영혼을 잠식하고 비관이 뇌를 지배했다.          

다시 빨리 일어서고 싶었다. 그러려면 외줄 탄 인생처럼 삐끗할 순간도 용납할 수 없는 위태한 나를 인정해야 했다. 자기혐오보다 차라리 자뻑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했다. 그러나 반성 못하는 능력은 신이 내린 저주라고도 했다. 그 사이에서 외줄 타듯 일상을 회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로션을 바르며 생각한다. 어디가 환자 같애?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아직 잘 생겼구먼. 짜식. 자뻑으로 위로하며 하루를 시작하기도 하고 지난 글을 보며 오글거리다가도 중환자실에서 쓴 게 어디냐며 나를 칭찬했다가, 그러게 왜 자꾸 줄에서 떨어지냐고 타박하는 내가 자꾸 부딪쳤다. 부딪치는 나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다. 대신 종일 명상을 하며 매일의 소소한 루틴을 지키지 못한 죄에 용서를 빌었다. 산책을 하고 커피숍에 앉아 무언가라도 썼다. 명상을 하고 반성을 하다 지치면 자뻑으로 나를 추켜세웠다. 어느새 뇌에 남아있는 너절한 비관의 흔적들이 지워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낙관이 비집고 들어서더니 슬슬 의지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근거 없는 낙관이라도 좋았다. 당장 무너지지 않고 버티며 살아야 하니까. 

     

마찬가지로 언젠가 또 이 글을 보며 손발이 오그라들 날을 기다린다. 

의지로 낙관한다는 말을 이제 조금 이해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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