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상 잡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틱 May 22. 2021

영상 바닥, 이건 알고 디디자

2화- 화장하고 면접 본 당신, 한 달이면 모자만 쓰고 다닌다.

영상 바닥엔 여자가 드물다.  

방송국엔 그나마 여자가 많다.  

방송국에 비교적 여자가 많은 것은 방송국이 기획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기획과 더불어 대본 작업은 작가가 주로 하고, 작가는 단연코 여자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현장 스텝이라 부르는 촬영, 조명, 음향, 편집 등의 스텝들은 주로 남자가 많다. 그러니 실 제작을 하는 외주 제작사에는 남자가 월등히 많다. 

(여담이지만, 이 바닥은 밤샘을 밥 먹듯 하고 출, 퇴근도 불규칙하니 제대로 연애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내가 아는 후배들 대부분은 사내커플이거나 협력사 커플인데, 여성이 드물다 보니 경쟁도 치열하다.)      

남자가 많은 이유는 간단하다. 체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자는 감각이나 기술이 딸려서 드문 게 결코 아니다. 

체력이 필요한 이유는 무거운 카메라, 조명, 음향 등 각종 장비를 들고 뛰어다녀야 한다는 것보다 밤샘을 밥 먹듯 해야 함을 먼저 꼽는데, 따져보면 밤샘 문제는 꼭 체력 문제라고 볼 수도 없다. 남자라고 며칠씩 밤을 새는 건 아니니까. 야전 현장에서 여성의 위생과 남성들에게 둘러 쌓여 쪽잠도 잘 수 없는 환경이 문제라는 게 차라리 맞지 싶다. 장비 중량에 의한 체력 문제라면, 요즘은 ENG 카메라뿐 아니라 조명, 음향 장비도 많이 경량화돼서 풀지 못할 문제가 아니다. 결국, 밤샘을 관행처럼 여기지 않으면 해결될 문제인데, 이건 업계 전반의 개혁(?)이 필요한 사안이다. (이 바닥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밤샘을 관행이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십오 년 간 제작을 하면서 이렇게 불편함에도 왜 꼭 밤샘을 해야만 하는지 아직도 합당한 원인을 찾지 못했지만, 아무튼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영상제작에 흥미를 가지고 입사한 여성들이 현장에서 떠난다는 게 안타깝다. 평생 딱 두 번 본 여자 촬영 감독님들은 어마한 포스로 촬영장을 휘어잡고 기막힌 장면을 포착해 내서, 쓸데없는 ‘곤조’나 부리는 남자 촬영 감독의 비위까지 맞춰가며 굳이 남자 촬영 감독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가지게 했다. 


편집이나 CG 분야는 컴퓨터로 이뤄지는 작업이라 그나마 여성 지원자가 있는 편이다. 

편집실에서 드물게 만난 여자 실장님들은 대부분 특유의 섬세하고도 밀도 있는 작품들을 창조해 냈기 때문에 ‘이 분야는 원래 여성이 장악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역시 남자가 많다.      


이 바닥에 여성이 드문 이유 중에는 복병처럼 숨어 있는 것도 있다.   

연출 분야를 예로 들면, 대부분 남자 스텝들로 구성된 제작 환경도 여자 조연출들을 몰아내는데 큰 역할을 한다. 보통 카메라나 조명 분야는(역시 체력이 필요하므로) 남자가 많고 여성 연출자는(역시 체력 때문에) 빨리 그만두기 때문에 어쩌다 들어온 어린 여자 신입도 체계상 자기보다 한참 나이 많은 카메라나 조명 남자 감독들을 어르고 달래며 지휘해야 하는 악순환 속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이다. 어떨 땐 못된 카메라 감독이나 조명 감독이 자기 밑에(?) 것들 놔두고 순진한 어린 여자 조연출에게 심부름을 시키기도 한다. 촬영이란 애초 변수란 걸 품고 시작하는 속성이 있어서 언제 닥칠지 모를 곤란한 시점 때 그 스텝들에게 의지해야 함을 익숙히 아는 메인 PD는 보고도 모른 척한다. 

조연출은 원래 고생하는, 아니, 고생해야 하는 직급이라는 병장이 이등병 대하는 심리도 PD에겐 있다. 

그녀들은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어 작가 언니들을 찾아가 위안이라도 받고 여자로서 받은 설움을 술과 함께 삼키며 버텨보지만 단단히 굳어 도저히 깨질 것 같지 않은 남자들의 세상에 질려 일치감치 짐을 싼다.           


이런 식으로 업계 속살은 모르고 언젠가 감독, 연출이라는 타이틀 뒤에 자신의 이름이 자막으로 흐르는 상상을 하며 순진하고 들뜬 모습으로 지원한 여자 조연출들은 입봉(조수에서 감독이 되는 것)하기도 전에 엉뚱한 외적 스트레스로 눈물 뚝뚝 흘리고 떠나는 것이다. 

내가 이십여 년 동안 만난 서너 명의 여자 PD들은 누가 무시라도 할라치면 먼저 들이받는 단단한 근성(전문 용어로 악바리)의 소유자인 데다 이틀 정도의 밤샘은 히히덕대며 할 수 있는 에너자이저였다.         




내가 가장 오래 근무했던 종합 제작사는 연출 및 작가 등 기획부서와 촬영, 편집, CG 부서가 함께 있어서 타 제작사와 비해 여자들이 많았다. 그녀들은 그나마 힘들거나 지칠 때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는 끈끈한 유대 관계가 있어서 비교적 오래 버텼다. 회사 내 서열은 존재했지만 각각 다른 전문성을 가지고 일처리를 하는 것이어서 그런 끈끈한 인간관계가 가능했다. 게다가 모두 다 힘들었다. (힘들 때 연대가 잘 된다.)     


방송 작가, 편집, CG, 어느 분야 건 누구나 신입 면접 땐 곱게 화장을 하고 화사한 미소로 면접을 본다. 그리고 힘차게 일찍 출근을 하고 약간 늦게 퇴근을 하기 시작한다. 주위 선배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으므로 딱히 떨어진 뚜렷한 업무가 없는 막내들은 괜히 눈치가 보여 같이 바쁜 척이라도 하고 싶지만, 뭘 해야 할지 몰라 뻘쭘하기만 하다. 차라리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으면 싶다. 

그녀들의 바람대로 며칠 뒤부터는 본격적인 업무가 떨어지고 밤샘이라는 걸 해본다.      


두 주일 정도 지나면 벌써 정시에 퇴근한 날이 몇 번 안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오늘도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란 말을 하긴 글렀다. 

감독이란 사람은 유부남 같구만 어제부터 집에도 안 가고 떡하니 버티고 앉아 편집 실장을 다그치고 있지, 

편집 실장은 줄 커피를 마시며 광속으로 마우스 질을 하고 있지, CG 언니는 컴퓨터가 렌더링(2,3차원 데이터를 시각 화면으로 변환하는 과정)을 하는 동안 고개가 뒤로 젖혀진 채 입 벌리고 졸고 있지.. 

이 언니들을 두고 먼저 퇴근한다는 건 커다란 배신이자 왠지 자신만 아마추어임을 드러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언니들이 며칠을 집에 못 갔는지 궁금해할 겨를이 없다. ‘내가 내일은 과연 집에 갈 수 있을까?’만 궁금하다.      

한 달쯤 됐을 땐 프로그램은 전파를 타기 위해 초를 다투고 있고, 잠깐 집에 가서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나오는 그 왕복 시간마저 아까울 정도로 자신이 발이 그 프로그램 제작에 깊이 담겨 있음을 깨닫는다.      


피 말리는 밤샘을 마치고 언니들을 따라 해장국 집으로 들어간 그녀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다크서클 위에 퀭한 눈. 떡 진 머리에 얹힌 절은 모자. 대체 이 모자를 며칠째 썼는지 기억이 안 난다. 

이제 언니들과 아침 댓바람부터 술을 푸며 TV에 자신이 참여한 프로그램이 방송되는 걸 본다.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엔딩 크레딧엔, 그러나 아직 자신의 이름은 없다. 그럼에도 난생처음 많은 사람이 볼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부푼다. 솟구치는 성취감과 들뜬 보람에 호들갑 떨며 언니들을 바라보지만 언니들은 그저 멍청한 PD와 준비성 없는 조연출을 욕하며 술만 들이킬 뿐이다. 

이제 몇 년 후 자신도 이렇게 후배 앞에서 PD 욕이나 하며 아침술을 푸고 있을 걸 상상하니 왠지 허망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상 바닥,이건 알고 디디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