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여인
하얀 겨울이 가고 시장엔 봄의 활기가 넘쳤다. 시장에서 봄꽃 향기를 맡을 수는 없지만 장을 보는 여자들의 화사한 옷차림에서 꽃향기가 났다. 시장 사람들은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시장이 활기를 띄자 대청소 날을 정하고 눈과 흙, 오물이 범벅돼 시커멓던 시장골목을 말끔히 닦았다. 그렇게 다가온 봄에 재수는 짝사랑의 안타까움에 속이 호떡처럼 시커멓게 타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본 날 들었던 곡은 어찌나 틀어댔던지 테이프가 늘어져 국악 타령 수준이 됐다. 그리고 그날 어머니의 앞치마에서 입대 영장이 꺼내졌다. 시커멓게 탄 재수의 가슴을 군대 영장은 탄환이 되어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게다가 일주일 뒤 입대라니. 재수는 당장이라도 국방부를 폭파시키고 싶었지만 하다못해 도시락 폭탄도 없었다. 백수다 보니 주변 정리할 것도 없고 고무신 거꾸로 신을 애인도 없어 딱히 시간이 부족한 건 아니었지만 그녀를 오래도록 못 본다는 게 원통했고 어쩌면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산산 조각난 가슴을 가루로 만들었다.
입대 전날. 입대의 공포보다 그녀를 이제 못 본다는 안타까움에 재수는 밤을 꼬박 지새웠다. 절실하면 없던 용기가 생기는 걸까? 재수는 이른 아침 벌떡 일어나 거울을 보고 결심했다.
‘말이라도 붙여보자.’
이대로 말도 못 붙여보고 입대를 한다면 군 생활 내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 뻔했다. 차라리 보기 좋게 퇴짜를 맞더라도 말은 붙여 봤다는 게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재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똑바로 쳐다봤다. 거울엔 태어나 처음으로 홀딱 반한 여자를 향해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게 지켜만 보는 찌질한 놈이 자신을 향해 비웃고 있었다.
재수 어머니는 입대를 앞둔 아들이 리어카에 다라이를 싣자 온몸으로 막아섰다. 그러나 벼랑 끝에 선 심정인 재수를 이길 수 없었다. 재수는 괜히 씩씩대며 리어카를 힘차게 끌었다. 그리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장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타령으로 변한 곡을 들으며 오로지 시장 골목만 노려봤다. 3월 봄날에 그녀를 처음 본 그날처럼 눈이 왔으면 하고 바랬다. 등원하는 그녀를 보겠다는 일념이 재수의 눈을 부릅뜨게 했다. 이윽고 오후 아홉시가 조금 넘자 가슴이 벌써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심과 용기는 어디로 가고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재수의 마음도 모르고 속절없이 마트 건물로 쏙 사라졌다. 재수는 제 머리통을 호떡 집게로 마구 쥐어박았다. 재수 어머니는 재수가 입대의 공포 때문에 그러리라 짐작하고 우황청심환을 사다줬다.
오후 네 시.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이제 그야말로 마지막 기회였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 못 볼 절박한 상황이었다. 다시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눈은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그녀를 따라가고 있지만 몸은 가위 눌린 것 마냥 움직일 수 없었다. 멀어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자니 뜬금없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에이, 씨발.”
재수는 집게를 던져버리고 무작정 포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 멀리 건널목을 건너는 그녀가 보였다. 재수는 무작정 도로를 달려 횡단해 버렸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정류장에서 기절할 만큼 긴장된 마음으로 섰다. 초봄인데 땀이 줄줄 흘렀다.
‘말을 건네기도 전에 날 피하면 어쩌지?’
‘맨 먼저 무슨 말부터 하지? 인사부터 해야 하나? 날 알지도 못할 텐데 웬 인사?’
살면서 이렇게 가슴이 뛴 적이 없었다. 백 미터 달리기 때도, 체력장 1Km 달리기 때도, 미친개라 불리는 수학 선생의 몽둥이찜질을 기다릴 때도 이렇진 않았다. 재수가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치는 사이 그녀는 재수 앞에 다다랐다. 그런데 젠장할.. 그녀가 타려는 710번 버스도 하필 정류장에 같이 도착했다. 그리고 승차 줄에 선 그녀. 이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재수는 납치하듯 줄밖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엉겁결에 끌려 온 그녀는 놀란 토끼 눈으로 재수를 바라봤다.
“저기요. 저기 시장에서 늘 봤는데요. 잠깐만 좀..”
재수는 차마 눈은 마주치지 못하고 건너편 시장 통에 시선을 박고 더듬으며 말했다. 그런데 어떤 반응도 없어 힐끗 그녀를 본 순간 재수는 어떤 자신감 같은 게 불쑥 올라오는 걸 느꼈다. 잔뜩 경계하리란 예상과 달리 그녀의 눈빛엔 어떤 호기심 같은 게 섞여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재수가 다음 말을 생각하는 동안 그녀는 살그머니 옅은 미소까지 짓는 게 아닌가? 용기가 솟구쳤다.
“저 내일 입대하는 데요, 애국하는 마음으로다가 주소 좀 주실 수 없을까요?”
재수가 준비한 말은 이게 아니었다. ‘저 사실 당신에게 첫 눈에 반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안나 늘 바라만 봤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말이라도 붙여 보고 싶었습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뭐 이런 거였다. 좀 점잖고 예의 있는, 영화에서 늘 보던 대사. 그런데 엉뚱한 말이 튀어 나왔다.
‘아 씨. 망했다.’
주책없는 제 말에 재수는 또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는 쿡 하고 입을 막고 웃었다. 응? 이 반응은? 그러나 그녀는 이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주소는 왜요?”
“그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군 생활 할라구요.”
이번에도 준비한 말은 아니지만 진심이었다.
그러자 다시 입을 막은 그녀의 손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서둘러 큰 가방을 열고 수첩을 꺼냈다.
‘???!!! 아. 됐구나.’
호떡집 조수 주제에 다짜고짜 주소를 달라는 놈팽이 요구를 이렇게 선뜻 응해주다니. 확실히 그녀는 천상에서 내려 온 여인이었다. 승차를 기다리는 승객 줄은 어느새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녀가 서두르는 모습에 재수가 더 조급했지만 동시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타요, 안 타요!!”
눈치 없는 버스 기사의 고성이 들렸다. 아무리 절실하다 해도 쪽팔린 건 쪽팔린 거라 버스 차창을 슬며시 봤다. 재수를 보는 승객들의 얼굴엔 짜증과 웃음이 섞여 있었다. 다급한 재수와 달리 메모지 한 장을 북 찢어 건네는 그녀의 모습은 차분하고 당당했다. 그게 또 왜 그리 멋있는지. 이 여자의 아름다움의 끝은 대체 어디일까? 그녀 손에 들린 작은 펜까지도 아름다웠다.
“감사합니다!! 편지 할게요!!”
재수는 버스에 오르는 그녀의 등 뒤에 대고 소리쳤다. 그녀가 창가에 설 때까지 재수는 그 자리 서서 제 볼을 꼬집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활짝 미소로 인사를 하자 재수는 자기도 모르게 경례를 했다. 그리고 멀어지는 버스를 보며 생각했다.
‘이거 지금 실화냐?’
재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가 준 쪽지를 열었다. 그리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군 생활 잘 하세요. 호떡집 청년. 그리고 씩씩한 모습으로 나오시면 제가 음악다방 데려갈게요.’
그녀는 호떡집 조수인 자신을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허구한 날 이어폰 꼽고 호떡 판을 드럼삼아 호떡 집게로 신나게 두드리는 꼴을 봤나보았다. 재수는 주저앉은 김에 아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버스정류장 사람들 속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던 재수는 벌떡 일어나 4차선 도로를 뛰어 횡단하면서 발장구를 쳤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벅찼다. 갑자기 초저녁 시장 통 위로 무지개가 펼쳐지더니 도로 위에 차들의 경적이 팡파레처럼 울려 퍼졌다.
그날 저녁 재수 친구들이 모였다. 재수는 밤새 친구들과 국방부와 병무청의 작태를 안주 삼아 술을 펐다. 재수는 술이 얼큰해지자 다른 놈들이 보면 닳을까 오염될까 숨겼던 그녀의 존재와 주소까지 받은 사실을 밝혔다. 그러자 그 엉큼함과 배신에 놀란 친구들은 주먹과 술 폭탄을 던졌다. 재수가 누군가에게 맞으면서 행복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신의 아들들이라 군 면제거나 간다 해도 동방위인 것들이 하는 군 생활 조언은 대개 허풍이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근거 없는 구라라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녀석들이 일러준 사실은 섬뜩했다.
“야, 재수야. 너 그 여자 보고 싶다고 탈영 같은 거 하지마라. 답장 안 온다고 욱해서 철조망 넘고 그러지 말라고.”
동방위 2개월 차인 한 녀석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모르겠다. 지금 같아선 그럴 것도 같은데 말이다. 그냥 탈영해서 그 여자랑 같이 어디 두메 산골에 몇 년 처박혀 살까?”
재수의 마음은 반은 농담이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말이나 붙여 봤으면 했지만 막상 쪽지에서 그녀 마음을 읽고 나자 당장이라도 그녀와 만나고 싶은 조바심이 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미친놈아. 몇 년? 지랄하네. 니가 아직 군대를 안 가봐서 국방부 새끼들이 얼마나 지독한지 모르지? 그 새끼들 탈영병 평생 추적해 임마. 잡혔는데 존나 늙어서 낼 모레 죽는다 해도 무조건 다시 군대 보낸다고.”
비록 동방위 말이지만 재수는 남일 같지 않아 섬뜩했다. 너무 보고 싶어 재수도 탈영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언뜻 한 것이다.
“야, 노재수. 너 욱하는 성질 여기다 다 버리고 가. 군대 가서 또 욱해가지고 고참 두들겨 패고 영창 가지 말고. 아니다. 차라리 정 못 참겠으면 그냥 패. 총 쏘지 말고.”
“재수야. 열 받아도 무조건 참아. 고참이 괴롭힌다고 자살하고 그러지 말고. 알았지?”
어떤 녀석은 재수가 성질 못 참고 고참을 팰까봐 걱정했고 어떤 녀석은 참지 못하고 자살할까봐 걱정했다.
“난 이제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 짜샤들아.”
재수는 호기롭게 외쳤다. 그녀만 있다면 군대 아니라 지옥에서도 모범 생활을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 졸였건만 그녀에게 뜻밖의 주소까지 받은 재수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아예 병나발을 불었다. 송별회를 빙자한 술판은 새벽까지 이어졌고 재수는 오랜만에 꽐라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