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 대로 살기

by 미스틱

영화 ‘기생충’을 계급 불평등에 관한 영화라 하는 건 표면적 해석에 치우치고 있다는 느낌이다. 보다 내밀한 메시지는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은 낮은 계급들이 신분상승 기회를 가지는 것 자체에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걸 말한다고 본다. 그것은 자기 것을 뺏길까 하는 공포라기보다 그들과 같은 부류가 되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다. 낮은 계급들은 태생적으로 ‘냄새’ 나는 천박한 종족이므로.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 됐을 때 기득권들은 그가 당선된 드라마보다 그가 앞으로 모셔야 할 대통령이라는 사실이 가장 끔찍했다고 했다. 노무현은 상고 출신에다가 그들이 쌓은 성 밖 다른 울타리 사람이니까. 그런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들과 같은 레벨의 무리에 들어온 것도 싫은데 대통령까지 됐으니 그가 하는 말과 행동 모두 무조건 싫은 것이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인사를 했어도 마음속으로는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반대가 아닌 막말로 하대했던 것이다.


나 역시 그런 ‘부류’의 벽을 몸으로 실감했던 적이 있었다.

20대 후반, 미래를 위해 온몸을 불사를 각오를 하고 인생 최대의 에너지를 쏟고 있을 때였다. 당시 영상 바닥에서 잘 나가던 회사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한참 배울 나이에 회사 분위기상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게 더뎌서 이직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중 한 군데는 지금으로 치면 1인 회사였는데 그 사장이자 실장의 감각이 좋았다. 편집기술 또한 훌륭했다. 규모보다는 가능성을 택하기로 했고 그곳으로 이직을 했다. 그 실장은 사진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두 명의 오너들과 한 층을 나눠 쓰고 있었는데 그 둘은 돈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사람들이었다. 한 사람은 그 건물주 아들이었고 또 한 명은 그의 친구였고 그 또한 돈보다는 취미로 사진을 하고 있었다. 그 실장도 돈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 그러니까 내 상관인 실장과 스튜디오 사장 둘 사이에서 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사는 이해 못 할 족속이었다. 제일 먼저 출근해 청소를 하고 다음 일까지 미리 해놓고 밤이면 편집기술을 공부하는 내 열정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땐 그들이 내게 위화감까지 느끼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왠지 날 어려워한다고만 생각했다. 그게 착각이고 실제론 날 배척한다는 느낌을 가진 건 몇 개월 후 나와 동갑내기 신입이 들어오고부터였다. 녀석은 경력이 없으니 내 조수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초짜가 며칠 만에 실장과 스튜디오 사장들과 더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실장을 포함한 넷은 그 건물 지하에 있는 룸살롱 멤버였다. 뿐만 아니라 주말이면 같이 스키나 래프팅 등 스포츠도 같이 즐기는 멤버였다. 그땐 이상하게 나도 그 멤버가 되고 싶었다. 그들이 좋거나 룸살롱이 가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난에 대한 열등감이 커서였는지 돈 좀 있다는 그들로부터 외톨이가 된 기분이 더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데려가겠거니 하는 희망을 가졌더랬다. 아직 자존감이 성숙하지 못한 때였다. 어쨌든 내 바람은 회사가 통째로 흡수합병 될 때까지 이뤄지지 않았다.


사장은 업무시간 외에 나와 어울리는 걸 내켜하지 않았는데 훗날 사장으로부터 들은, 그들이 내가 이질적이고 꺼림칙 한 존재로 여긴 이유가 어이없었다. 매사 너무 진지하고, 여유 없이 너무 열심이고, 교양이 없고, 저급하게 보였다나? 하긴 나는 욱하길 잘하고 말도 거칠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싶었지만 열심인 게 꺼림칙하다니. 사장은 ROTC 출신이라는 대단한 자부심이 있었다. 사병출신이 아니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다른 존재인 냥 행동도 말도 젊잖게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집안이 넉넉하니 즐기며 일하는 자신을 특별한 계급으로 여겼었다. 스튜디오 사장 둘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을 정말 후지게 찍어서 손님은 가뭄에 콩 나듯 왔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진 실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손님이 안 와도 걱정이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실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여하간 자시들이 찍은 사진을 분석하고 색다른 사진을 연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건물주 아들은 늘 오후 네 시만 되면 퇴근하자고, 술이나 마시러 가자고 재촉했다. 내 조수이자 동료인 녀석은 제 엄마가 고리대금업으로 자신을 키웠고 본인은 그 돈으로 어린 나이부터 술집에서 여자를 끼고 술을 먹으며 컸다. 녀석 역시 영상기술을 배우는데 열정 따윈 없었다. 뭔가 가르쳐주려 하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태도였다. 녀석은 내 눈엔 경쟁이 태생적으로 안 맞아 빽으로 길을 찾는 천부적 소질 외에는 도무지 발전의 가능성이 없어 보였지만 회사 내 모두는 녀석을 끼고 지냈다. 죽이 잘 맞았나 보았다. 녀석이 아직 카메라 기술도 제대로 못 배웠던 입사 일 년 후 역시 빽으로 YTN 보도국에 들어갔다. 녀석이 YTN에 취직이 확정된 날 그들은 역시 지하 룸살롱에서 축하 파티를 했다. 그때 처음으로 내게 합석을 요구했다. 난 일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맞다. 난 교양과 거리가 멀었다. 여유를 가질 틈도 없이 컸다. 열등감도 있었다. 그러나 학창 시절 돈과 연관된 것에선 스스로 왕따를 자처했지만 돈과 관련 없는 운동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기타 예능 활동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할 만큼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열심이었다. 더구나 성인이 돼서는 교양이니 여유니 하는 것들을 사치라 여길 만큼 삶에 치열해야만 했다. 내가 처한 환경이 그랬다. 계획한 건 아니지만 삶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다. 어릴 때는 환경이 나를 빨리 어른이 돼라 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누가 쥐어주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어깨에 책임을 얹고 세파와 맞섰다. 때론 맑고 순수한 또래를 볼 때면 정체 모를 억울함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었다. 그렇게 산 나를 그들이 다른 부류로 봤겠지만 그걸 여유 없고 저급하게 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의 삐뚤어진 의식이야 말로 저급하다고 따지거나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쩌면 그들 말대로 우리 사이엔 넘지 못할 벽이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새로 계열사 프러덕션을 차리려는 기업 사장의 제안이 있었고 우리 회사는 흡수 합병이 됐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었다. 그 회사 사장은 다른 곳에서도 두 명의 후임을 영입했는데,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실장을 누르고 실세로 군림했고 난 밑바닥 생활을 한 눈치를 발휘해 재빨리 이직을 해버렸다. 하지만 그 실장은 눈치 없이 제 잘난 맛으로 버티다 사장과 후임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나서야 반 강제 퇴사를 했다. 몇 년 후 나는 제법 잘 나가는 프러덕션 총괄팀장이 됐고 그 실장은 나를 찾아와 일거리를 부탁했다. 오래전 추억 같지도 않은 추억을 끄집어내면서 말이다. 그땐 실장의 모습 어디에서도 ROTC 출신이라는 자부심이나 교양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포트폴리오를 요구했고 그가 내민 영상을 보니 나와 같이 일했던 그때 그 감각에 머물러 있었다. 영상기술과 감각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영상이 너무 가볍고 저급해서 같이 할 수 없겠다고 돌려보냈다.


난 과거의 내 시간이 현재의 나를 잡아놓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아무리 잘 자란 사람처럼 행동하고 생각하고 싶어도 나도 모르는 사이 막 산 흔적을 여지없이 드러내곤 했다. 그 순간에 알아차리면 그나마 다행일 텐데 문제는 그 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거였다. 그건 뭔가에 필을 받아 노트에 휘갈겨 놓고는 며칠 뒤 정신 차리고 보니 비문에 맞춤법까지, 못 배운 티를 다 내고 있는 내 낙서장을 본 것 같은 민망함 같은 거였다. 지적인 사람처럼, 깊이 있는 중년처럼 보이고 싶은 욕구와 가식 없이 솔직하고 싶은 내 자아는 늘 충돌을 일으켰다. 클래식을 들으면 내가 알지 못했던 고급스런 세계와 만날 것 같아 들어보지만 늘 졸리기만 하고 그냥 충동대로 팝을 듣는 순간 세상이 다 이해되는 기분이 충돌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투박한 삶의 티가 나는 게 두려웠었다. 곱게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평온함을 닮고 싶었었다. 그러나 역시 살아온 이력은 늘 어떤 형태로든 존재를 증명했다.

오십 중반인 지금, 이제는 마음을 내려놓고 있는 중이다. 생긴 대로 살기로 했기 때문이다. 가린다고 가려질 게 아님을 알게 됐다. 열등감에 기인한 조급함이 가식으로 이어지고 오히려 나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됐다. 누굴 닮으려 하지도 않고 타인의 시선 따위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부족한 것만 채우기로 했다. 차라리 거칠었지만 열심히 살았고 양심을 지키고 비겁하지 않게 살았음을 자부하고 살기로 했다. 이제 어렵게 자란 걸 숨기고 싶지도 않다. 또 성인이 되어서도 기구한 곡절을 수없이 겼었음을 부인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산전수전 겪으며 찢기고 아문 상처들이 내공으로 승화돼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조용히 가라앉아 있기만 바란다. 그러다 언제고 시련이 닥치면 조용히 기어 올라와 헤쳐 나갈 힘으로만 작용하길 바란다. 불쑥불쑥 내가 잘 살고 있나 의심이 들기도 한다. 육체의 나이에 대한 두려움은 미래에 대한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전력투구 한다 할지라도 내 삶에 대한 의구심은 마찬가지일 것임을 알기에 지금의 삶에 믿음을 가지자고 다짐할 뿐이다. 조금 더 알뜰하게 시간을 보내자고 다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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