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열정

by 미스틱

- 혼술 혼창 -


‘내우외환’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내는 요즘, 난 주 6일을 일한다.

집구석에 처박혀 우울감에 젖느니 손님을 맞이하여 부러 웃는 낯으로 있고 싶어서다. 그렇게 한 주의 일을 마치면 가급적 독서와 글쓰기로 직행하지만, 지난주엔 한 주를 잘 이겨냈다는 만족감과 그에 대한 보상을 스스로 하고 싶어선지 발길이 호프집으로 옮겨졌다. 아마도 내가 운영하는 가게 내에 흐르던 음악 방송에서 추억 돋는 노래를 들어서일 확률이 높다. 호프집으로 향하던 중, 우울한 중에도 음악 한 곡 듣고 흥이 돋는 내가 신기했다가 원래 흥이 넘치고 끼가 꿈틀댔던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LP 바나 음악 카페가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사는 후진 동네엔 그런 게 없어서 퍼블릭 호프집 한 귀퉁이 앉아 이어폰을 꽂았다.


생맥주가 두 잔 들어가니 여지없이 흥이 돋는다.


‘이 곡의 이 부분이 원래 흥겨웠던가? 이 부분에서 기타가 치고 나오는 걸 그동안 왜 못 들었을까?’


이러다 보면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난다. 내 어깨가 아직 관절 좋게 미끈한지도 깨닫는다. 오늘따라 이리저리 어깨를 들썩이는 나와 눈이 마주친 알바생이 알쏭달쏭한 미소를 보낸다. 추한 노땅의 모습이 더 드러나기 전에 서둘러 나온다.


집 책상에 앉아 다시 리플레이. 그러고 보니 한 달을 참 열심히 살았다. 장하고 뿌듯하다. 그래서 늘 들었던 음악이 오늘따라 반갑고 신선했구나 싶다. 이젠 발라드 곡도 흥겹다.


“dust~ in the wind~ 더스트 인 더 위~~~이이이~~ 인드~ 아~~아~~악~~”


가수보다 내가 더 감정에 이입하다 보니 가성이 비명소리가 된다. 누가 안보길 다행이지.

혼술과 혼창은 이래서 좋다. 감정을 가감 없이 미친 척 쏟아낼 수 있으니.

음악은 무슨 힘으로 이리 사람을 휘두르는가. 음악의 존재 덕에 텅 빈 감성주머니를 채우고 노란 꿈을 꾸며 잠에 드리란 예감이 든다.




- 워크맨과 마이마이 -


사춘기 시절, 눈이 떠짐과 동시에 음악이 자동 재생되는 내 방을 꿈꿨다. 방 두 개짜리 월세살이에 내 방조차 없던 형편에 참 허황된 꿈이란 건 그때도 알았다. 해서 친구 집을 내 집인 양 드나들었다. 친구 놈은 물론이고 그 집 식구 누구도 커다란 턴테이블 오디오(전축)를 건드리지 않았다. 때문에 그 장치는 내가 가야 깜박 불을 켜고 제 기능을 했다.


당시 컴퍼넌트 오디오는 있는 집에선 인테리어 소품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간혹 쓴다 해도 산간벽지나 두메산골, 아니면 사방 100미터 이내에 이웃집이 없는 외딴 저택이 아닌 이상 출력 성능의 10%도 제대로 쓰지 못했다. 그런 내 사춘기 시절에 오디오 장치를 개인 허리에 찰 수 있는 워크맨의 등장은 나뿐만 아니라 또래들에겐 엄청난 문화적 혁명이었다. 컴퍼넌트 오디오가 가구로써 그 집의 계급을 드러냈다면, 워크맨은 부를 세습받은 자식의 계급을 나타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도 내 주위 강남 8 학군 고삐리들은 정철영어를 워크맨으로 듣는 것으로 학급에서 우월한 계급을 과시했다. 가슴에 서적을 얹기보다 워크맨을 허리에 차고 헤드폰을 머리에 둘러 세련된 대학생임을 뽐내는 모습은 버스에선 흔한 풍경이었다.


일본제 ‘소니 워크맨’에 틴에이저들이 열광하자 삼성이 발 빠르게 ‘마이마이’를 출시했다. 이후 가전사들은 ‘아하’, ‘요요’ 등 이름조차 조악한 유사제품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렇게 닮은 꼴을 출시해 봤자 비짜는 비짜였다. 일단 음질에서 현격한 차이가 났고, 디자인도 소니 워크맨이 전자기기다운 무게감이 있다면 유사제품은 장난감처럼 가벼워 보였다. 기업이 보급형 유사제품을 출시한 결과 있는 집 애들은 소니 워크맨을, 없는 집 애들은 삼성 마이마이를, 그마저도 형편이 안 되는 애들은 집에서 라디오와 카세트플레이어 일체형으로 만족해야 했다. 기업은 그조차 소비자 계급을 세분화해 맞춤형 제품을 내놓았다. 일체형은 모노 사운드와 스테레오 사운드로 나누고, 카세트플레이어도 한 개짜리와 두 개짜리 더블 데크로 나누었다.


어떻게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싶었던 중3인 나는 현실적 목표를 정했다. 그리고 새벽 신문배달에 나섰다. 그리고 두 달 만에 안테나 달린 라디오와 카세트 플레이어 일체형, 게다가 스피커 하나짜리 손바닥만 한 모노 카세트 플레이어를 손에 넣었다. 아직 소니 워크맨의 음질을 경험하지 못했던 나는 일체형 카세트 음질만으로도 행복했다. 오후 두 시만 되면 라디오 주파수를 ‘두 시의 데이트’에 맞추고 녹음 버튼에 두 손가락을 얹고 지냈으며, 밤이며 ‘별이 빛나는 밤에’를 틀어 놓고 원하는 곡이 송출되길 바라며 눈을 비볐다. 그렇게 하나 둘 녹음한 카세트테이프에 곡명과 가수를 깨알같이 적으며 이 세상에 딱 하나 존재하는 희귀 소장품을 만드는 재미에 빠져 지냈다. 주파수가 낮은 AM 방송을 녹음한 데다, 일체형 카세트플레이어의 음질은 원래 그러려니 했지만, 버튼이 눌리는 소리까지 녹음되는 것만은 보통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그 무렵 호감 가졌던 여자애에게 나처럼 정성 들여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선물 받고는 버튼 소리가 녹음된 걸 듣고 관심이 없어진 건 무슨 심보였을까.


졸업을 앞둔 겨울, 옆자리 친구가 내 귀의 이어폰을 슬그머니 빼더니 제 이어폰을 내 귀에 꽂았다. 그때의 전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마도 보니 M의 곡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시작부터 경쾌한 타악기 소리가 왼쪽 귀를 때리더니 정수리를 지나 오른쪽 귀로 넘어가는 게 아닌가? 그 음질의 선명함과 온몸을 휘감는 입체감에 난 신세계를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애의 손엔 소니 워크맨이 들려 있었고, 이어폰도 소니 제품이었다. 그날 경이로운 스테레오 사운드를 맛본 나는 어떻게든 소니 워크맨을 갖고 말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내가 소니 워크맨을 가지게 된 건 그로부터 거의 3년이 지난 고 3 때, 대학을 포기하고 아예 막노동판에 나선 후였다.




- 발명 클러스터, 세운상가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날라리 백수시절, 내 주 무대는 아이러니하게 ‘대학로’였다. 당시의 혜화동 대학로는 주말이면 왕복 4차선 도로의 차량통행을 막고 젊은이들의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이름이 대학로니 대학생들이 모일 것 같지만, 거리를 메운 사람들 대부분은 중고생들과 나 같은 젊은 백수들이었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활보할 수 있었다. 당시 대학로는 젊음의 상징과도 같았고, 스케이트보드 묘기, 동아리 밴드 공연, 길거리 연극, 버스킹 등 각양각색의 아마추어 무대가 펼쳐져 축제를 방불케 했다. 그들 스스로 무대 주연이 되기도 하고 관객이 되기도 하면서 서로를 응원하는 뜨거운 열기가 주말마다 아스팔트를 달궜다. 해가 지고 아스팔트 열기가 식으면 우리는 그 위에 작은 원을 그리고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기타를 쳤다. 배운 적 없는 ‘후루꾸’ 기타 실력이지만 그저 리듬만 맞아도 금세 어깨동무가 이뤄졌고, 옆의 원과 그 옆의 원이 자연스레 합쳐져 커다란 원이 됐다. 일면식 없어도 기타와 노래만 있어도 우린 친구가 됐다.

3년 만에 소니 워크맨을 겨우 소유한 내가 어른 상체만 한 더블 테크 오디오 플레이어를 가지게 된 것은 그 낭만의 거리에서 느낀 쓸데없는 경쟁심 때문이었다. 어디선가 일렉트릭 기타 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면 이에 질세라 기타 줄이 끊어져라 긁어대 봤자 고출력 앰프를 거친 음량을 이길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통이 아닌 ‘후루꾸’에 익숙한 나는 당시 못 만드는 게 없던 세계 1위의 ‘후루꾸’ 기술력을 자랑하는 청계천 세운상가를 뒤졌다. 기성 제품이 없으면 구매자와 머리를 맞대고 설계도까지 그리는 그들의 기술력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곳 사장님께 내가 부탁한 건 간단했다.

"포크 기타로 일렉트릭 기타 소리를 내고 싶다."


그리고 황당한 내 요구에 맞는 제품이 일주일 만에 뚝딱 나왔다. 그건 주파수를 이용해 음파를 변조하는 ‘이름 없는 발명품’인데, 포크 기타의 동그란 구멍 안에 손바닥만 한 그 제품을 넣어 붙이고, 미리 설정된 주파수에 더블 데크 일체형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포크기타 소리가 일렉트릭 기타 소리로 변조되어 스피커로 출력되는 방식이었다. 그 사장님의 시연을 보고 왜 이런 기술력과 발명능력으로 허름한 건물에 작은 가게의 사장인지 무척 궁금했다. (세운 상가는 언제가 반드시 역사에 재조명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건 ‘삐짜’, ‘후루꾸’란 딱지를 달 수밖에 없지만, 고가의 일렉트릭 기타와 앰프, 스피커에 비하면 그 발명품 값은 껌 값이었기에 난 일주일 막노동 일당을 다 쏟아 그 세기의 발명품을 손에 넣고 대학로로 향했다. 영화 속 흑인들이 어깨에 제 몸만 한 카세트 플레이어를 짊어지고 브루클린을 걷는 모습을 상상하며 말이다. 일렉트릭이란 착각 속에서 주구장창 긁었던 기타 소리가 어딘가 인위적이고 깊이가 없어 질리기 시작한 건 백수 생활을 접고 장사를 하면서부터였다.




-음악 열정-


옛 화양리, 지금의 화양동에 커피숍을 연 것은 20살 되던 해였다. 대학교가 두 개나 있어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커피를 팔 요량이었다. 중년 여성이 운영하던 술집을 인수한 것인데, 외관이나 실내가 술집이라기보다 아늑한 카페 분위기였던 게 좋았지만, 무엇보다 계산대 옆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클래식 디자인의 LP 턴테이블을 보고 두 말없이 계약을 했다. 부잣집 거실에 가구처럼 우아하게 놓여 있던 그 턴테이블을 드디어 내가 갖게 된 사실에 무한 감격을 했다. 계약이 끝나고 난 LP 판부터 돌렸다.

‘지직’


바늘(스타일러스)이 판에 닿는 순간 나는 그 소리에 감격의 소름이 끼쳤다. 오래전, 친구 집에서 듣던 원음에 가까운 그 생생함에 감동하고, 그 생생한 음악을 이제 마음껏 들을 수 있다는 사실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때부터 매출보다 다시 청계천과 황학동 시장을 뒤지고 다니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일명 ‘빽판’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고가의 정식 음반으로 진열대를 채우기에는 주머니가 너무 가벼웠던 것도 있지만, 음반 사전 검열 때문에 발매를 못한 앨범이나 수록되지 못한 곡 등, 희귀 음반을 구할 방법은 ‘삐짜’, ‘후루꾸’ 길 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을 듣기 위해 온 손님들 덕에 매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게 됐다. 어느새 가게 손님들은 단골로 이뤄졌고, 손님들이 술을 직접 가져다 먹고, 난 가게 밑, 음반 매장 TV 앞에서 해외 뮤지션들의 공연을 즐겼다. 사춘기 시절, 내 방에 음악이 흐르는 꿈이 스무 살에 실현됐고, 난 그곳에서 청춘의 한 지점을 감성 충만하게 통과했다.

삭막한 군 시절에도 늘 음악이 그리웠으며, 사회인이 되어 영상제작 일을 할 때도 기획, 촬영, 편집 등 밤샘 작업 후 몸이 녹초가 됐어도 마지막 음악 작업 때는 피로를 잊고 직접 선곡하고 삽입 작업까지 손수 했다. 그 시간이 제작 프로세스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술이 감성을 증폭시키는 게 분명함을 그때 알았는데, 녹음 작업 후 그 여운을 주체하지 못해 집 앞 주차장에서 캔 맥주를 마시며 내가 삽입한 곡을 듣다 주책맞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이가 심장을 굳게 만드는 건지, 감성을 무디게 하는 건지, 언제부턴가 음악에 심취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결혼이라는 현실의 무게와 부모라는 어깨의 짐이 커질수록 나만의 시간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주변에 탄식 같은 넋두리를 늘어놔봤자 당연하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누구나 다 그렇다.’


음악이 직업이지 않는 한 빡빡한 현실 속에서 음악적 감성을 온전히 유지하는 건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낙담했다. 그러나 간혹 차 안에 흐르는 음악에 심장이 뛰고, 어깨가 들썩이는 걸 보면 또 아직 심장이 그리 딱딱해진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맥주 한 잔과 이어폰만 있으면 금세 낭만에 빠지는 걸 봐도 그랬다.


독거인이 되자 난 다시 음악 열정에 불을 지피기 위해 오래된 기타를 잡아봤다. 이십여 년 전 사고로 손가락의 인대와 신경이 절단된 후 방치해 둔 기타였다. 무감각한 손가락이 제대로 줄을 잡지 못할 거라 여겼었다. 바라보고만 있자니 아쉽고 버리자니 과거를 통째로 버리는 것 같아 골동품처럼 모셔두었던 기타였다. 먼지를 닦고 팔을 두르고 난 뒤, 난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이십여 년 만임에도 손가락은 여섯 줄 위의 제 위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감각이 없어 미세한 삑사리는 나도 아예 엉뚱한 음을 내지는 않았다. 혹사시키고 망가트린 내 몸이 그렇게 감사할 줄 몰랐다. 덕분에 늙음도 열정을 이기진 못하리라, 역시 나이는 음악 취향을 바꾸긴 해도 열정과 상관없다고 믿게 됐다.

기타가 정복되면 사춘기 시절 꿈꿨던, 그러나 아직 시도도 못한 드럼을 배워 보고 싶다. 기타야 ‘후루꾸’가 통했지만, 드럼은 살 수도 없고, 빚을 내서 산다 해도 놓을 때가 없어서 엄두를 못 냈었다. 그 큰소리는 어떡하고. 때문에 드럼만큼은 정식 코스로 배우는, 내 인생에서 ‘후루꾸’ 딱지를 떼게 할 첫 번째 관문이 될 수도 있다.


요즘도 가슴에 모래가 들어찬 듯 푸석할 때나 심장 박동이 느려지면 이어폰을 꽂기도 하고 방문을 꼭 닫고 기타를 튕긴다. 기타와 같은 이유로 버리지 못하고 박스에 담아뒀던 악보를 꺼내 한 곡 한곡 기억을 더듬어 튕긴다.


“띵까, 띵까~ 더스트 인 더 위~~~이이이~~ 인드~ 아~~아~~삑~”


이놈의 삑사리. 가수를 꿈꾸지 않았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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