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도서관을 다녀오다 그 놀이터를 가로질러 가게 되었다. 지난 몇 년간 여름에 매일 아이와 왔던 곳이다. 이곳을 지나치는 것만으로도 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아이가 돌을 줍고 개미를 구경하는 동안 나는 피곤하고 외로웠다. 아이는 기관에 가지 않았다. 가기 시작한 후에도 오전 동안 짧게 있다 오는 게 다였다. 해가 길게 늘어지는 여름동안, 아이를 돌보고 말상대를 해주는 건 나 말고는 없었다. 나는 방어적인 성격이라 주변에 말을 섞을 엄마들이 많지 않았다. 호기심 많은 3살 남자아이는 찻길도 뛰어들려 했고 지나가는 동네 개들을 만지려고도 했다. 나열하기도 벅찬,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이의 행동을 계속 지켜보고 통제하며 삼시 세 끼를 먹이는 일까지. 아이의 뒷바라지를 해나가는 일은… 모르겠다. 나같이 로션도 겨우 바르는 사람에겐 너무나 피로한 일들이었다. 하루는 이렇게 살다가 죽을 것 같아서 한의원에 갔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젊은 남자 한의사가 무슨 일로 오게 되었냐고 물었다. 내가 이 폭염에 하루 최소 3시간은 바깥에서 애를 놀리고 있다고 했고, 최근엔 머리가 너무 어지럽다고 했다. 의사는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 이야기를 했고 그는 고단한 환자를 위로하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았지만, 내 머릿속엔 '네가 애를 키워봐야 내 마음을 알지 뭘 알겠냐'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애를 키우는 건 대체 무엇이 길레 친절히 위로하는 사람도 밀어내고 이상한 우월감 속에서 자조하고 있게 만드는가? 왜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희생을 자처하다 피해자 정체성만 꽁꽁 싸매 입게 되었을까.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내 아이를 오랜 시간 돌보면서 나는 많이 고단하고 외로웠던 것 같다. 그래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엄마 옆에 있는 게 아이에겐 가장 안전하고 편안할 거라 생각해서 끼고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엄마는 절대적인 존재 아니던가. 이제 막 세상을 탐험할 나이에 실내에서 갇혀있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최대한 많은 걸 보여주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맛은 떨어져도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게 해주고 싶었다. 낮잠도 밤잠도 엄마 냄새를 맡으며 편하게 자게 해주고 싶었다. 아이가 마음껏 엄마를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내가 마음껏 누리지 못했던 꼭 그만큼 너는 더 많이 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결국 내 결핍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아이는 꽤 오랜 시간 기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온다. 나는 그동안 운동도 가고, 책도 읽고, 여유롭게 커피도 한 잔 한다. 그 놀이터는 이제 잘 가지 않게 되었다. 아이는 기관 근처의 놀이터에서 익숙한 친구들 놀고, 나는 한 두 마디씩 말을 건넬 엄마들도 생겼다. 아이 마음속에 엄마를 꽉 채워서, 엄마 곁에 있으면 참 좋고 엄마는 언제나 내 편이라고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게 절반 이상은 성공했다고 느낀다. 아이는 "엄마가 좋아"라는 말을 자주 하고, 내가 안아주면 금방 울음을 그치며, 기관에 가기 전엔 늘 헤어지기 싫다고 한다.
폭염의 놀이터에서 버티던 날들이 너와 나를 이만큼 가까이 붙여놓았다. 육아서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애착이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