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라주] 성당
조카는 마드리드와 톨레도를 여행하고는 그때 이미 ‘이제 성당은 그만~!’을 외쳤다. 비신앙인인 조카는 처음 몇 번은 성스러운 성전의 분위기와 수많은 조각, 회화, 성물에 감탄을 하더니, 그다음부터는 다 비슷한 거 같다고 했다. 성당, 교회, 왕궁 등 수 백 년 전에 지은 건축물로 현재까지도 전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관광경제 위주의 유럽의 모습은 메타버스 시대를 살고 있는 MZ 세대인 조카에게는 느리고 발전이 없고 새로움이 없다고 받아들여진 거 같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여러 도시를 둘러봐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단다.
그렇지만 2022년 8개월간 예비신자 교육을 마치고, 출국 당일 성당에서 세례명 ‘체칠리아’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된 나로서는 유럽의 성당을 방문하는 일은 ‘동시성’이 일어난 것 같이 의미 있는 매 순간들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당의 크고 화려한 성물도 감탄할 만큼 멋졌지만, 유럽의 소도시 곳곳에 일상 속에 자리 잡은 오래된 성당의 주말 미사에 참여하고, 도시를 탐방하느라 지친 몸을 잠시 쉬려고 성당에 들어가 십자가 앞에서 잠시 기도하는 시간도 감사했다.
한국의 깔끔하고 모던한 동네 성당과 달리 유럽 성당들은 역사가 깊은 만큼 건물도 오래됐고 성물도 화려했다. 여행 마지막 날, 귀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로마 가톨릭 교회의 마드리드 대교구 대성당인 알무데나 대성당에 들렀다. ‘백색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화려한 마드리드 왕궁 바로 옆에 있다. 스페인 수도가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이전하면서 지은 대성당이다. 건축기간이 무려 100년이 넘게 걸려 1993년에야 비로소 완공됐다. 이 성당이 특별한 이유는 8세기경 이슬람이 마드리드를 점령하자 성모상이 파괴되는 것이 두려워 ‘알무데나’ 성벽에 숨겼는데, 380년이 지나 마드리드를 수복한 알폰서 6세의 행렬이 지나는 순간에 때마침 성벽이 무너지면서 성모상이 발견됐다. 그래서 성당 이름이 알무데나 대성당이다. 긴 건축기간의 결과 네오고딕부터 팝아트 데코양식까지 다양한 건축양식이 적용됐다. 성당 안에는 이 성당이 유명한 이유인 성모상을 모신 곳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긴 줄이 이어졌다. 성당을 가득 채운 성물과 성화 가까이 앉아서 천천히 시간을 갖고 그 형상을 눈으로 좇으면서 마음에 담아봤다. 크고 높은 성당의 내부는 아주 어둡고 추운 데, 높은 천장에 자리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밟은 빛이 들어오는 모습이 성스러웠다.
세비야 대성당도 기억에 남는다. 스페인 최대 성당이자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이다. 이슬람 사원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는데, 이 성당도 100년이 넘어서 완공됐다. 황금색의 찬란한 빛이 눈 부시도록 화려한 성당이다. 그 중심은 80년에 걸쳐 제작한 화려한 황금의 주제단이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여주는 45개의 장면을 섬세하게 나무로 조각했고 금을 입혔다. 도금의 무게만 1.5톤이 넘는다. 스페인의 황금기인 대항해시대를 연 세비야가 당시 얼마나 대단한 위세를 떨쳤는지 알 수 있다. 바로 이곳에 대항해시대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관이 있다. 이탈리아 출신 항해가인 콜럼버스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던 이사벨라 여왕이 사망하자 자신에게 등을 돌린 조국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콜럼버스는 ‘죽어서도 절대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는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당시 스페인을 지배한 4개 왕국의 왕들이 콜럼버스의 관을 메고 있는데, 실제로 관이 공중에 떠 있다. 재밌는 건 앞 줄에 콜럼버스를 지지한 카스티야와 레온 왕은 당당히 앞에서 웃는 표정으로 관을 메고 있고, 당대에 콜럼버스를 냉대한 아라곤과 나바라 왕은 뒷줄에서 관을 맨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더 재미있는 건, ‘위대한 항해’를 한 콜럼버스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신대륙이 인도라고 알았다는 점이다.
조카는 세비야 대성당보다 바로 옆 이슬람 성채인 ‘알카사르(alcazar)’의 매력에 푹 빠졌다. 월드디즈니 만화영화 ‘백설공주’의 무대다. 이슬람으로부터 세비야를 탈환한 후, 매력적인 이슬람 문화에 빠진 페드로 1세 왕이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을 따라 지은 걸작이다. 특히나 외국 대사를 맞이한 화려한 방과 궁중 여인들이 이용한 목욕탕, 작은 샘뿐 아니라 타일이 오밀조밀하게 붙은 내실과 아담한 실내 정원부터 오렌지 나무와 열대 식물이 가득한 야외 대형 정원까지 볼거리가 가득하다. 조카가 이번 여행 중에 가장 많이 사진을 찍은 장소를 뽑으라면 바로 알카사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