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라주] 서점, 미라재즈
이제 2주 여행의 끝이 보인다.
코로나 이전 한국 여행자들이 유럽 한 달 살기로 인기였던 도시, 포르투. 마지막 여행지인 만큼 이제 어느 정도 해외여행에 익숙해진 조카와 약속한 대로 포르투에서는 각자 자기 스타일대로 따로 또 같이 여행을 하기로 했다. 아침식사 후 저녁식사 때까지 자유시간. 일러스트에 관심이 많아져, 렐루서점, 갤러리 거리와 찜 해둔 재즈카페에 가기로 했다.
먼저 렐루서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자 작가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 집필에 영감을 받은 곳이다. 서점인데도 불구하고 예약과 입장료를 받는다. 책을 구매하면 입장료가 차감된다. 그래도 좀 과하지 않나 했는데, 작은 서점 앞에 길게 선 관광객들과 좁은 서점 안에서 책보다는 사진촬영에 열중인 모습을 보니, 서점의 정체성과 수익 달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구나 인정했다. 실내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고전적 디자인이다. 1-2층을 연결하는 빨간 바닥이 인상적인 나선형의 아름다운 계단과 높은 천장에서 빛을 내리는 스테인드글라스. 솔직히 나도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은 아기자기함에 감탄을 연발했다. 마침 당일 1층은 어린 왕자 콘셉트의 쇼윈도 디스플레이라서 정말 동화책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렐루서점 방문 기념으로 포르투 도시를 그린 수채화 일러스트 북을 샀다.
렐루서점에서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갤러리 거리로 이어졌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독서를 좋아하고 아름다운 포르투는 예술가들이 사랑하는 도시다. 갤러리와 편집샵을 둘러보다, 우연히 그림책 전문서점 [Papa-Livris]을 찾았다. 점심식사 후 늦게 서점으로 돌아온 직원이 문 열기까지 밖에서 기다리다, 그림책이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앞에서 책을 천천히 음미했다. 친절한 직원 설명 덕분에 언어가 장벽을 느낄 수 없이 그림만으로도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을 소개받았다.
포르투갈어로 쓴 라트비아 작가 아테네 멜레세의 그림책을 구매했다. 한국에는 [키오스크]란 제목으로 출판이 됐다. 뚱뚱한 몸으로 도심 속 길거리 좁은 키오스크 안에서만 사는 올가는 그럼에도 행복하다. 친절한 올가는 근면성실하게 매일 단골손님과 관광객들을 위해 신문과 잡지, 잡화를 팔고, 저녁이면 키오스크 안에서 여행잡지를 펼쳐보며 언젠가 바다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가진 소시민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 갑작스러운 사고가 닥쳤다. 키오스크 밖에 놓인 과자를 훔쳐 달아나는 아이들을 잡으려다 키오스크에 몸이 꽉 낀 채 통째로 넘어져버렸다. 그런데, 어? 키오스크가 움직인다. 붙박이처럼 키오스크에서의 삶을 받아들이고 만족하면서 살았는데, 올가는 몹시나 당황스럽고 패닉에 빠질 것 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키오스크를 본인이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상황을 물 흐르듯이 받아들여 즐긴다. 키오스크를 든 채로 올가는 처음으로 걸어서 도시를 산책하며 만나는 단골손님들에게 인사하고, 우연히 강물에 빠져도 그 상황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유영하며 유유히 떠내려가다 보니, 도착한 곳이 바로 올가가 그렇게도 꿈꾸던 바닷가 휴양지.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은 키오스크 안에서 석양이 지는 바다를 바라보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느긋한 올가의 모습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내가 살던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는 일을 경험한다. 직장을 잃을 수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을 수도 있고, 사업이 망하기도 한다. 그런 삶의 위기가 닥쳤을 때, 올가처럼 지금 인생의 한 챕터가 끝났다는 것을 깨닫고, 무한 긍정성을 가지고 새로운 모험을 떠날 수 있을까? 40대의 나이는 세컨드 라이프를 생각해야 하는 데, 올가의 이야기가 단순한 동화책의 내용이 아니라 나의 상황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 그림책을 어른들을 위한 그림책이라고 하는지 알 거 같다.
올가에게 일몰의 바닷가가 동경의 대상이라면, 나에겐 재즈클럽이 그렇다. 그래서 여행을 결정하면 여행지에서 재즈클럽을 찾는다. 포르투에서는 일몰맛집이라는 [미라재즈]를 방문했다. 도루오강이 보이는 언덕 중턱에 위치한 미라재즈는 아쉽게도 여름 성수기에만 라이브 재즈공연을 한다. 그래도 재즈음악과 따뜻한 티를 마시면서 도루오 강변이 한눈에 펼쳐지는 풍광의 야외 발코니에서 석양을 드로잉 노트에 담았다. 조카와 바쁘게 장소를 이동하면서 관광을 하는 것도 여행의 추억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한 장소에서 혼자 오랜 시간 머물면서 그 장면을 눈으로 마음으로 그림으로 남기는 경험도 여행의 즐거움이다. 특히 이번 스페인-포르투갈 여행은 새롭게 시작한 트래블 드로잉으로 더 잔잔하게 채워지는 여행의 즐거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