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지금
어릴 때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우리 엄마는 생계를 위해 회사에 다니시기 시작하셨다.
막내 남동생이 6살 무렵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집에 항상 엄마가 다니는 회사의 라면이 종류별로 몇 박스씩 있었던 것 같다. 엄마는 돈 계산과 돈의 이치를 잘 아시는 분이셨고 젊을 때는 경리 일을 하셨다.
집에는 항상 나와 여동생 남동생이 집에 있었고 커가면서 나와 동생들은 집에서 간편하게 라면으로 가끔 끼니를 때웠다.
라면이 그리 좋은 음식이 아니라고 다들 생각하지만 나와 우리 동생들은 밥보다 라면을 더 선호했다.
여름방학 때였다. 엄마가 퉁퉁한 돼지저금통에 500원을 넣는 것을 발견하고는 엄마가 출근하시고 안 계실 때 우리는 돼지저금통의 뒷 배를 갈라서 조금조금씩 꺼내 그동안 못 먹었던 간식거리를 야금야금 사 먹었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눈치 빠른 우리 엄마가 저금통이 가벼워 진걸 보고 우리를 불러모았는데 이상 하게 많이 혼나진 않았다.
엄마는 어이없어하시곤 오히려 간식 사 먹을 돈을 조금씩 주시곤 출근하셨다. 나는 이제 서야 알았지만 그때 당시에 우리가 일주일 동안 먹은 간식비는 얼추 5만 원으로 기억한다.
그 후로 엄마는 돼지저금통을 쓰지 않았다. 아마 충격이 크셨던 것 같다.
그렇게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원 없이 간식을 사 먹어봤다. 내 첫 번째 소원을 이루었다.
그리곤 다음 그리고 다음 소원들은 어른이 될 무렵 이루어졌다.
가난하다 라는걸 남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오빠는 가난하다는 걸 언제 알았어?
그런데 대답은 의외였다.
"뭐 그런 거 계속 못 느꼈는데? 시골이라 다 고만고만하게 살았고 옷 뜯어지고 뭐 그런 것도 나는 남자라 그런가 별 신경 안 썼고 밥도 안 굶고 잘 지냈고 "
그런데 나는 아니었다.
나는 이미 내가 가난하다는 게 어떤 건지 잘 알았다. 먹고 자는 게 해결되어도 다른 친구들이 가진걸 난 맘껏 가질 수 없다는 게 가난 한 거란 걸 나는 이미 알았다.
그리고 중학교 내내 엄마는 도시락 반찬으로 돈가스를 매일 튀겨주셨지만 거기서도 나는 엄마의 정성보다는 매일 같은 반찬에 한번 놀라고 매번 같은 맛에 두 번 놀랐다.
돈가스 먹는 가난한 중학생은 들어봤나?
우리 집은 가난보다는 내 마음의 가난이 없어지질 않았던 것 같다.
내 주변 친구들과 비교해서 내가 가진 게 없어서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있지만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다.
준비물을 살 돈이 없어 친구에게 빌려 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솔직히 준비물 살 돈 달라고 하기도 미안해서 몇 번 혼나도 그냥 학교에 간 적도 있다. 난 그래서 미술시간이 싫었다. 사라는 게 왜 이리 많은지.
내가 공부에 전념한 이유는 공부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에서였다.
그래서 정말 죽기 살기로 공부했다. 하지만 돈 들여 학원 다니는 애들은 이길 수 없었다.
돈이면 그때는 다 되는 시대였다.
두 번째 소원은 내가 번 돈으로 부모님께 선물도 사드리고 내가 평소 사고 싶은 것들을 사는 거였다.
대학교 가기 전에 겨울방학 때 소시지 공장에서 아르바이트한 후 이루어진 소원이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하며 몰래 먹은 따끈한 소시지 값이 아르바이트비보다 더 많은 건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가끔 아찔하다.
그리고 정말 마지막 소원은 내 집 마련이었다. 그 소원은 1년 전 결혼 8년 차에 이루어졌다. 힘든 신혼집 두 번의 이사 끝에 이르어졌다.
정말 아꼈다. 아끼고 또 아꼈다. 여자들의 보물 명품 가방 하나 없어도 너무 행복했다.
내 소원은 항시 돈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냥 돈은 아니었고 내 노력 우리 가족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지금은 가난과는 정반대다 그렇다고 부자는 아니지만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나와 내 남편이 경제관념이 생기게 해 준 부모님과 시부모님들은 우리 경제능력을 키워주셨고 우리는 더더욱 소박하게 삶을 살면서 더불어 사는 법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
가난은 대물림 된다 라는 무서운 속담은 이제 믿지 않는다. 우린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절약하는 현명한 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기도 했다.
진짜 가난은 마음의 가난이다.
그 무엇으로도 그 어떤 소유로도 채울 수 없는 허기짐과 공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