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이 포도청
낯을 많이 가리고,
사람 많은 곳을 싫어해서
가끔은 공황장애를 의심하곤 했었는데
혈육이 뭐라고..
신발 매장을 운영하는 동생이
구인에 어려움이 있다며 SOS를 쳤다.
처음에는 듣는 둥 마는 둥
무시하다
태국에서 한량 시절을 보내며
통장에서 숫자"0"이 뒤에서 하나 사라지고,
앞에 숫자가 9,8,7 바뀌면서
마음이 조급해 질 무렵
매일 풀 타임(Full time)
뛰는 동생의 퀭한 얼굴을 보고 시작했다.
브런치 작가가 될 때 내 지원 동기는 아래와 같았다.
"태국에서 무에타이와 요가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태국에서의 익숙한 듯 낯선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랬는데..
우선은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한 공간인 신발 매장에서 낯선 고객들과의
이야기를 먼저 적기로 했다.
판매직 경험이라고 말하기 뭐하지만
15년 전 약국에서 처방전 입력하는 알바를 했었다.
약국 한 곳에 영업사원이 약사님한테 부탁을 해서
화장품을 진열해서 판매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뿔테 안경에 머리도 잘 안 감던 약사님 대신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전산 업무하고 있던
피부 탱탱한 나한테 화장품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화장을 잘 못하지만
젊음이라는 천연 스킨케어를 받아
윤기가 좔좔 흐르는 피부를 갖고 있던 나와 온천수를 기반으로 만든
화장품은 코드가 잘 맞았었다.
내 것도 아닌 샘플을 약을 기다리며
멍 때리던 손님들한테 선심 쓰듯 팍팍 주기 시작했다.
다음 방문 때는 샘플 포장지를 가져 와
화장품 구입을 원하는 손님한테
팔다보니 매출이 꽤 나왔다.
탄력 받은 판매량에 영업사원은 나를
강남에 있는 해외 화장품 본사에
데리고 가서 백화점 판매직원들과
같이 교육을 듣게 했다.
서비스 및 화장품 판매에 대한 교육을
몇 회 받고 기존보다 더 많이 팔았다.
자신감과 자존감 모두 높았던 시기였다.
어려서 모든게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학교 복학을 하며 그만뒀지만,
이게 내 유일한 판매 알바 였다.
대학, 낯선 땅으로 파견업무, 한국에서 회사원, 여러 잡다한 알바
그리고 여행을 다니던 시간을 걸쳐,
난 대인기피증 딱 전인 그렇게 사람과는
멀고도 멀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다시 판매직 이야기로 와서,
백화점 신발 매장에서 동생과 둘이서 교대로 신발을 팔고 있다.
해외 브랜드로 편한 신발이라고
이름이 알려져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그래서 내 또래보다는 언니,이모,엄마나 고모뻘인 분들이
많이 오신다.
굽이 아찔하게 높은 하이힐를 젊은 시절 많이 신으셨겠구나
싶은 무지외반이 심한 분들이 아직도 이쁜 신발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온다.
"이쁘면서 편한 것 좀 가져와봐"
"그런건 없는대요"
"신발이 이렇게 많은데 왜 그런게 없어? 추천 좀 해봐"
인기 있는 스타일로 가져오면
"촌스러워"
"불편한대"
"비싸!"
반은 지친 표정으로
"고객님 마음에 쏙 드는 편하고 이쁜 신발은 없거나 많이 비싸요"
"그래도 그나마 나은 것 좀 가져와봐~ 센스가 없어"
"진열된 신발 신어보고 마음에 드는 스타일
알려주시면 사이즈 찾아 드릴께요. 우리 오늘 초면인데
선호하는 스타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 저것 신어보고
투덜대고 떠난다.
처음에는 내가 센스 없음에 슬펐다.
경험이 쌓이고 노하우가 생기면
바로 찾아 줄 수 있을꺼야..
낯을 가리던 나는
오기가 생겨 더 열심히 손님한테 들이대고
장시간 근무를 하며 깨달았다.
내 잘못도
센스 없음이 아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