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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주 Aug 23. 2020

한국인이라 다행이다.

우리나라가 쵝오!

캐나다, 미국, 호주로의 이민을 많이 꿈꾸는

한국 사람들.

나 역시 막연하게 멋진 선진국에서의 삶을 동경했었다.

어릴 적에 봤던 잘생기고 예쁜 백인들이

멋진 옷을 입고 아름다운 풍경을 뒤로 여유 있게

마시던 와인과  푸짐한 음식이 세팅되어 있는 테이블.


해외영업부에 입사하면서 호주, 프랑스 제품을 담당하면서 호주, 프랑스 사람들과 미팅하게 되었다.

타이틀은 영업부였지만 이미 사장님이 기존에 계약했던 회사를 담당하는 MD 역할이었다.

미팅은 주로 내가 주재했던 중국, 베트남 공장의 컨퍼런스룸이나 홍콩에 있던 그 회사 오피스에서

이루어졌다.


팀장님이 꼭 선물을 챙겨가라서 나름 고민하고 5-6만 원 정도의 선물을 고르고 그들을 만났을 때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고, 피식 웃으면서 뇌물이니?라는 뉘앙스로 쳐다보기도 했고

자신은 안 받겠다고 정말 딱 선을 긋는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감으로 보였던 모습이 시간이 지나면서 우월감으로 많이 보이긴 했다.


홍콩에서 미팅이 끝나고 공항 가는 시간이 남아 회의했던 사무실에서 잠깐 머문 적이 있었다.

홍콩 사무실 직원이 음료 수하고 간식을 주려고 들어왔고, 한국 여행에서 음식이 맛있었다며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다.


그 날 미팅에서 꽤 오만한 행동을 했던 호주 담당자 이야기를 하면서 여기서 1주일 있었다고 했는데

어땠냐고 물어보자, 자신도 그 담당자의 행동이 꽤 불쾌했는지 나하고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직원은 호주가 본사인 자신의 회사는 그나마 호주 사람들하고 같은 공간을 공유한단다.

'그나마'라는 말에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위층에 입주한 벨기에 회사는 문화차를 이유로

벨기에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무실, 탕비실, 화장실이 홍콩 직원들과 다르단다.

당연히 벨기에 사람들의 공간이 훨씬 좋다고 한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백인과 흑인의 화장실처럼.


내가 영업을 하는 입장에서 만난 미국, 호주, 프랑스 사람들은 대체로 오만했다.

미국 담당자가 회사에 아버지를 모시고 왔는데, 멀쩡히 있다가 아들이 뭔가를 수정해 달라는

요청을 할 때 아버지라는 사람이 허락도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우연하게 본 사진은 아들이 뭔가를 요구하고

난 받아 적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말로 그 사진에 내 얼굴이 나왔는데 그건 알고 있냐고 말했더니

"Whatever" 아무렴이라는 말을 무심하게 내뱉고 배고프다고 언제 밥 먹냐고 아들한테 물어봤다


나중에 미국 담당자한테 그 이야기를 했다.

내 얼굴이 같이 찍혔는데 싫으니까 삭제해 달라고.

그랬더니 '감히 너가 이런걸로 나한테 따져'라는 식으로 별거 아니잖아!라고 어색하게 어깨를

툭 치고 다른 곳으로 갔다.

누구보다 초상권에 민감한 미국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오만했던 부자였다.


샘플이 진행되고, 다른 브랜드로 미팅이 있어서 홍콩에 갔을 때 그 미국 샘플은

샘플 제작 경험이 20년이 넘었던 베트남 담당자가 확인 후에 미국으로 발송되었다.

나중에 너무 사소해서 그게 언급이 될 부분이 아니었음에도 '정말 작게 나온 너 얼굴이 싫다고

삭제해 달라고 요구했던 그런 깐깐함으로 제품을 보고 보내지 그랬어?'라고 메일에 보냈다.


뜬금없이 팀장님도 참조를 넣어서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되고,

팀장님이 나한테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하고 의논 후에 회신했다.


'나한테 참조 넣은 의도가 궁금하고,

일하는 자리에 아버지를 모시고 온 아마추어적인 행동에 실망하고 있었는데 무례하게 회의 장면을 촬영할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초상권이 있는데 허락도 없이 직원 사진 찍은 것도 불쾌한데

삭제 요구에 특별하지 않다고 말하는 너에 태도에 아주 불쾌하고 오만한 행동이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는 너네 제품을 생산 안 하기로 했고, 샘플 작업했던 모든 내용을

구입하고 싶으면 얼마를 내고 구입해 가던지, 아니면 전부 폐기 처분하겠다'


그 메일을 보고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매일 쪼기만 했던 팀장님이 다르게 보여서 감동의 눈을 가지고 한국에 계시던 팀장님한테 전화했다.


"야! 감동하지 마.  그 새끼들 오더 보내온 수량 보니까 생산하고도 손해야.

어디 돈도 안 되는 것 가지고 갑질 하고 지랄이라니.

그리고 앞으로는 그런 일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 수고해라'


그리고 전화는 끊겼다.

나중에 그 미국 담당자는 팀장님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제품 생산해 달라고

요구를 가장한 부탁을 하며 매달렸고,

거만한 행동에 돈도 얼마 되지 않겠다는 확신에

거절했다고 한다.


회사를 퇴사하고 어학연수라는 큰 이유와

유럽에서 놀고 싶다는 생각에  몰타에 갔을 때였다.

같이 집에 살던 한국 동생 두 명과 밥을 먹고 집에 오는 길이었다.

횡단보도에 서 있을 때 정차했던 차에 백인 여자애 2명과 남자애 1명이 나와서 눈을 찢으며

'쏭쏭쏭' 비꼬는 말투로 원숭이 흉내를 내면서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태권도 전공했던 동생과 당시 20대이고 싸움에 나름 자신이 있던 나는 뛰어가서 맞더라도 싸우려고 했는데,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 침착했던 다른 동생이 말렸다.


'언니. 우리가 구경하고 있으니까 쟤들이 원숭이인 거예요'


그 말에 내가 박수를 치면서 "오!! 몰타 원숭이!! 유럽 원숭이라서 키 하고 코가 크네!"

그러자 태권도 전공했던 동생이

"잘한다. 더 해봐.. 소리가 작네.. 더 크게 안돼?"

라고 하자 당황했던지 여자애들이 욕을 하기 시작했고, 남자애는 화가 난 얼굴로

달려들려는 제스처를 하자, 동생 중 한 명이 다른 한쪽을 가리키며 '경찰'이라고 하자

움찔한 표정을 지었다.

신호가 바뀌고도 씩씩대자,

뒤에 있던 차에서 덩치 큰 아저씨가

몰타어로 뭐라고 하면서 화를 내자 애들은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고 떠났다.

뒤에 있던 몰타 아저씨는 우리 앞에서 잠시 정차하고 내려진 창문 사이로

미안하다고. 애들이 어려서 개념이 없으니까 너네가 이해해줘.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회사 생활을 하다

호주로 1년 살기를 하러 갔을 때

같은 집에 살던 대만, 한국 친구들과 중국 식당에 갔을 때였다.

식당 앞에 있던 메뉴판에서 음식을 고를 때 지나가던 차에서 여러 명이

우리를 향해 계란을 던졌다.

난 다리에 맞아서 약간 짜증이 났을 뿐이었지만, 뒤돌아 본 친구들의 몰골은 참담했다.

얼굴과 머리에 잔뜩 맞아서 당황한 얼굴로 계란 껍질을 서로 떼어주고 있었다.

얼굴에 맞았던 여자 친구가 울기 시작했고, 머리카락으로 흐르는 달걀을

닦아주던 대만 친구도 울었다.

건너편에 있던 호주 경찰은 우리를 지켜보다,

왜 안 도와주는데라는 제스처에 다른 곳으로 갔다.

안타까운지 입을 가리며 안타까워하던 호주 사람들은 잠시 쳐다보고 자신들 할 일을 이어갔다.

지금도 차 안에서 달걀을 던진 후 깔깔거리며 웃었던 어린 남자애들의 목소리가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난 한국이 좋다.

인종차별을 당하지도 않고,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당당하게 112로 신고해서

억울함을 주장할 수도 있으니까.


헬조선이라고 하지만,

이번 정부의 코로나 대처법도 그렇고,

아직도 변화해야 되는 부분이 많지만

난 우리나라 사람으로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남에 감사하다.


나이 들어가는 싱글 여자의 삶이 아직은 고단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질적으로나 인식면에서도 많이 개선된 거 같아 다행이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해도 소수지만 그렇다고 극소수는 아니니까.


코로나가 좋아지고 돈이 있다면 세계어디를 가도 되고, 한국에서 내가 배우고 싶은 것 배우고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면서 한국에 살아도 되니까.


이런 생각은 얼마 전부터 하고 있었는데,

TV에서 군함도를 우연하게 보고

갑자기 지금 시대에 한국인으로 태어나 정말 다행이다 혼자 토닥이며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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