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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슬주 Mar 03. 2023

영어 학습지 교사

밥벌이 단상 1

가장 일하고 싶을 때는

아마도 돈이 없을 때가 아닐까 싶다.

2021년 11월에 일을 그만두고

제주도로 한 달 살기 하러 갔을 때가

몇 개월 전 같았는데 그 사이 1년 4개월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난 오롯이 백수로서 삶을 충실히 살았다.

익숙했고 편했다.

무기력이 나태로 번진 지는 오래전.

게으른 일상에 젖어들다 못해 완전히

푹 절여진 생활에 위화감이나

불안함은 아주 간헐적으로 머리를 스쳐 지나갈 뿐

최대한 이 시간을 연장에 재연장하고 싶었다.

그러다 카드값을 고민하게 되었다.

카드를 만든 이후로 단 한 번도

다음 달 카드값을 걱정한 적이 없었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항상 일정 금액이 통장에 있었고,

돈을 그리 많이 쓰지 않았다.

1년 4개월 동안 빚 없이

이리 잘 놀았으니 선방했다 싶었다.


보험사에 전화해서 적립되어 있는 금액이

얼마인지 물어보고 출금했다.

약관대출이 아니라, 일정 금액을 미리 받아

나중에 실비가 오르면 대체 납입될 금액이었다.

3년 전에 3백만 원이 넘었었는데,

어째 금액이 많이 줄어 있었다.

병원 간 적이 없는데 왜 금액이 줄었냐고 물어보니,

나이대에 비례해서 보험료가 오른다고 한다.

그 돈을 찾아 다음 달 카드값을 내기로 했다.

그리고 구직사이트를 보고 한 곳에 입사지원서를 냈다.

가고 싶은 곳보다는 연락 오겠다 싶었던 곳에 넣었더니

공고 마감되던 날 면접 일정이 담긴 문자가 왔다.

자기 소개하고 간단한 테스트를 본다고 했다.

줌(zoom)으로 면접을 본다고 해서

며칠 뒤에 곱게 화장하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성인 대상 영어 학습지 회사라서

난 회화 위주라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독해를 시켰다.


-읽고 해석하세요.


그래서 읽는 것은 쉬우니 쭈~욱 읽었는데

오랜만에 소리 내서 하는 독해에 어버버 혀가 꼬였다.

자기 소개할 때만 해도 흡족해하던

면접관들 얼굴에서 웃음이 살짝 보였다.

자세히 해석해야 하는데,

난 영화 리뷰 유튜버처럼 맥락을 집어

이런 이야기를 하네요라고

둥글게 말했다.


이전에 아이들을 가르쳤기에 파닉스 위주였고,

독해가 있기는 했지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미리 예습을 하고 아이들을 만나서

헤맨 적이 없었다.


많이 당황했다.

내 실력이 이 정도인가?

그렇다. 그게 딱 내 실력이었다.

거기에 손 놓은 기간도 길었다.


면접이 끝났을 때, 테스트 후에 했던 질문에서 느껴졌다.

합격하겠구나.

면접관이 원했던 물 흐르듯 유연한 독해는 아니었지만

미리 예습하면 문제없겠구나 싶었나?

여튼 1시간 뒤에 합격했다는 글과

함께 본사 교육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담긴 문자를 받았다.

한강일세~

주말 보내고 월요일 오전,

서울 본사에 교육받으러 갔다.

다행히 10시부터 시작해서 출근시간대를  피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본 한강이 반가웠다.

재택근무 그리고 긴 백수 생활에 길들여져 있어서

간만에 출근이 살짝 설렜다.

설렘이라는 감정의 포인트는 희소성이라도 생각한다.

드물고 낯선, 비일상적일 상황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흥분?

한강을 본 내 심정이 그랬다.

본사하고 연결되어 편했다.

본사에 도착했더니 매니저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간식도 많고, 지원자가 없었는지 아니면

깐깐하게 면접을 보셨는지

교육생이 몇 명 없었다.

다른 언어 선생님들하고 같이 교육받았는데

영어는 나 포함 세명이었다.


다른 곳보다 시급이나 복지가 그리 좋지 않아서

지원자가 많지 않았을까 예상해 본다.

그럼에도 이곳에 지원서를 낸 건.

블로그에 학습자들이 올린 교재를

미리 봤을 때 많이 쉬웠다.

내가 머리 싸매고 열공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르치겠구나 싶은

자만심 + 게으른 마인드가 컸다고 해야 되나?

그리고 대기업이라 신원 확실하고,

급여 따박 입금되고

무엇보다 교재가 꽤 체계적이었다.

교재로 유명한 회사니

나도 뭔가 배우지 않을까 싶었다.

날씨가 추워서 도시락으로 먹음

다른 곳에 서류를 넣기는 했는데,

뜬금없이 영어로 자기소개 영상을 찍어서 보내란다.

그건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합격해서

일을 한다고 했을 때

내 소개 영상이 사이트에 뜬다고 한다.

유튜브에도 많은 교사들의 자기소개 영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유튜브 채널에도 얼굴은 블러 처리하고 있는 판에

내 얼굴이 여기저기 다닐 수도

있는 상황이 싫어 영상을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은 초등학생이 80%였다

교육생이 적어 더 좋았다.

지금 일하기로 한 곳에 가장 큰 메리트는

성인 대상이라 학부모 상담이 없었다.

학생 수로 돈을 받는 학습지 특성상,

학부모 상담은 급여와 별개로 진행된다.

그래서 돈과 복지를 떠나 일하고 싶었다.


이틀 간의 본사 교육은 어렵지 않았다.

시스템하고 어떻게 학습이 이뤄지는지를 비롯해서

컴플레인 대처법등 여러 CS도 배웠다.

마지막 시간은 교사와 학생을

서로 맡아서 모의 수업을 했었는데,

이상하게 내가 교사할 때마다

매니저님이 학생이 되었다.

그래서 더 긴장했다. 대체 왜 긴장하는뎃!


수업 때 필요한 헤드셋, 드로잉 패드하고 펜,

카메라, 교재 2권을 받아 집으로 왔다.


그리고 다음 날 교재 전권을

다 받아서 훑어보는데 살짝 걱정이 되었다.

대학 때 토익시험 본 이후로 문법을 공부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 교재는 회화는 아주 기초적인 것만 하고

문법과 독해가 90% 였다.

그래서 테스트 볼 때 독해를 시켰구나.

교육 때 눈치는 챘지만 생각보다 교재 양이 많아서

수업 전까지 다 보고 준비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열공 중~

그래서 공부하고 있다.

수능 치는 학생처럼.

 



어제 첫 수업을 했다.

2월이 28일에 삼일절이 있어서

3월 2일에 첫 수업이었다.

그래서 1주일이라는 시간이 있었는데,

교재가 반복학습이 핵심이다 보니 집중하기 힘들었다.

양도 방대해서 자꾸 딴생각하다 유튜브보다 책을 덮었다.

그래서 수업 당일날 학생들 진도만

확인 후에 바로 수업에 들어갔다.

첫 학생은 영어를 잘했다.

무역회사 근무하다 휴직 중이었다

조만간 복귀 예정이라

연습 겸해서 한다고 했다.

회화를 해야 하나. 그런데 교재는 독해였다.

다행히 전화영어로 따로 회화를 한다고 하니,

교재 보고 수업했다.

이곳은 체계적인 레벨테스트 없이 전화상담할 때

이것 읽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분한테 많이 쉬웠다.

거기에 내가 너무 어버버 해서 이실직고했다.

오늘이 첫날이라고.ㅋ

웃으면서 괜찮다고.

교사인 나를 많이 배려해 주셨다. 땡큐!


이날 총 13분의 학생을 만났는데.

다들 너~~ 무 너무! 좋았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분들만 만날 수 있는지.

첫날에 좋은 분들 만나 다행이다 싶었다.


그럼에도 실수를 몇 번 했다.

문법에 취약한 사람이 문법을 가르치려니.

갑자기 교재 없는 내용을 질문하는 분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아는 내용이었다. 휴~


첫 달이고 내가 전 회사에서 많이 배정된 회원으로

힘들었던 경험을 말씀드렸더니

회원이 많이 배정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성인 대상 교육이다 보니 저녁에만 몰리고,

오후에는 거의 없었다.

교육받고 첫 수업을 하고 느낀 생각은

다른 알바를 하나 더 해야겠구나.

먹고 하자!

어제 수업 이후로 다음 수업 전까지

영어 문법만 파야겠다는 생각에

출근할 때 한강 보고 느꼈던 떨림을 다시 느꼈다.

나를 공부하게 했다.

회사 다닐 때 혹은 외국 친구들하고 대화할 때

내 모국어가 영어가 아님을 상대도 알고

나 역시 피력했기 때문에

조금 틀린다 한들 별 상관없었다.

사실 외국 애들도 문법 무시하는 애들이 워낙 많아서

가끔 내가 시제가 맞지 않다고 반문하기도 했으니.


그런데 지금은 학생이 정확히 집어서 물어본다.

이게 맞나요?

이건 뭔가요?

대체 왜 다른가요?


설명해야 된다.


아이들은 파닉스에 간단한 문장 만드는 게

주된 수업이었기에

가르치는 2년 동안 사실 공부 안 했다.

그런데 어제 딱 하루 수업하고

머리에 깊은 울림이 울렸다.


너 공부 안 하면 망신당한다...


그래서 공부하고 있다. 예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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