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으그흐 Sep 26. 2023

이건 그 연극이 아니야

국립극단 <벚꽃동산> (2023)

우리는 수많은 것을 기록합니다. 맛있는 음식, 예쁜 노을, 멋진 나. 기억할만하다 생각할 때면 어김없이 사진을 찍곤 하죠. 순간의 소중함은 영원할 기록 앞에서 잊히고 맙니다. 그러나 영원할 기록은 수많은 사진 중 하나로 저장되어 있을 뿐입니다.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기에, 영원함은 영원의 가치를 갖지 못합니다.


저는 연극을 좋아합니다. 순간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거든요.

가끔 환상적인 장면을 만나곤 합니다. 몇 년이 흘렀음에도 내 마음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장면과 감각. 그것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간절히 염원하곤 합니다.


<스푸트니크>의 배우들이 노란 태양을 응시하던 순간

<파랑새>의 어둠과 틸틸과 미틸의 울음


기억을 곱씹다가, 한번 더 보러 가지 않은 나를 질타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압니다. 다시 보러 갔더라도 그 장면은 만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걸요. 그래서 무대 앞에서는 모든 감각을 열고, 눈앞의 장면을 느끼기 위해 집중합니다. 극이 끝나면 기억하려고 용을 씁니다.



흔히 연극의 3대 요소를 배우, 희곡, 관객이라고 말합니다. 4대 요소를 꼽으라 하면 여기에 무대를 더하지요. 누구인지도 몇 명 인지도 알 수 없는 관객이 무대를 밀어내고 3대 요소에 자리 잡고 있다니 재미있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벚꽃동산>으로 연극의 3대 요소로서의 관객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가끔 이 극이 그리울 때면 "오 나의 사랑하는 벚꽃동산"이란 대사를 모사할 정도로 애정합니다.)



안톤 체홉의 <벚꽃동산> 속 인물은 서로 다른 계급과 역사를 상징하죠. 이 인물들의 만남과 부딪힘을 통해 한 세대의 종말과 개혁 그리고 전복을 그려냅니다. 그러나 누구도 단죄받지 않고 각자의 삶을 이어가고, 서로를 존중합니다. 2023 국립극단의 <벚꽃동산>은 세대의 변화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니 놀라웠습니다.


주요 인물인 라네프스카야는 "오 나의 사랑하는 벚꽃동산"이라고 말하지만,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 벚꽃동산을 되찾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방안을 '상스럽다'여기며, 그래왔듯 돈을 낭비할 뿐이죠.


저는 라네프스카야의 모순이 빛을 발하는 무도회 장면을 좋아합니다.


벚꽃동산을 잃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좌절한 라네프스카야는 페챠에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울부짖다가도, 몇 년 새 머리가 많이 빠지고 늙어버린 페챠를 비웃으며 "왜 이렇게 늙어버린 거예요!"라며 웃습니다. 울음과 웃음을 오가는 라네프스카야의 모순은 그를 온전히 연민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불쌍하지만 그는 충분히 불쌍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아이러니가 <벚꽃동산>의 미감을 만듭니다. 낭비와 회피로 벚꽃동산을 잃은 라네프스카야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지만, 울음과 웃음의 균형 속에서 그녀는 매우 사랑스러웠습니다.

<벚꽃동산> 속 개혁을 긍정하되, 몰락한 귀족인 라네프스카야도 어디선가 행복하길 바랄 수 있었던 건 제가 그녀를 동정하고 사랑했기 때문일 겁니다.



다시 보고 싶었기에 몇 주 뒤 한 번 더 명동예술극장을 찾았습니다. 만석이었습니다. 이날 관객들은 웃음이 후하더군요. "와하하" 조금이라도 개그 요소가 있는 곳이라면 "와하하" 유쾌하게 웃었습니다.


웃음은 무도회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왜 이렇게 늙어버린 거예요. 페챠!"

"와하하!!!"


관객은 라네프스카야의 울음에는 응답하지 않았지만, 비웃음에는 함께 웃었습니다.


이 장면은 울음과 웃음의 균형 속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고 믿었는데, 웃음에의 치우침은 새로운 미감을 만들어내더군요. 아이러니는 옅여지고, '몰락한 귀족의 철없음'과 '명예와 부를 잃어 마땅한 자질'이 부각되었습니다. 라네프스카야를 덜 연민하며 계급의 변화를 응원하게 되었달까요.


저는 웃음과 울음의 균형이 만들어낸 아이러니가 더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웃음이 가득한 <벚꽃동산> 또한 제가 만난 하나의 순간이었고, 그 순간에만 만날 수 있는 미감을 전해주었습니다.

SNS를 통해 사람들의 감상을 찾아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있는 관객의 호흡을 느끼며 그들의 생각을 감각해 보는 것. 나와 같고 다른 감상을 느끼며 작품의 또 다른 미감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순간에 함께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연극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최근 들어 관객으로서의 매너를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미동 없이 앉아있기, 모두가 합의된 곳에서만 박수를 치기 등이 권해지곤 하지요. "나도 너의 관람에 영향을 주지 않을게. 그러니 너도 나의 감상에 영향을 주지 마."


그러나 저는 관객이 원하는 곳에서 웃고, 울고, 손뼉 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연극의 3대 요소 중 하나일 수 있기를요. 배우의 컨디션과 연기라는 변수에 관객이라는 변수를 하나 더 넣어, 누구와 함께 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극의 맛을 즐길 수 있길. 비록 그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장면을 다시 만날 수 없더라도, 새로운 재미가 끊임없이 생겨날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한국의 신화] 난 네가 우스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