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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Oct 10. 2023

[한국의 신화] 닿지 않을 염려를 추스르는 법

조왕신과 어머니

휴대폰이 울립니다. 엄마에게서 온 전화네요.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서."

"일 하면서 잘 지내고 있지요."

"밥은 먹었고?"

"응. 잘 챙겨 먹고 있어유. 엄마도 별일 없지?"

"응 잘 있지. 그려~ 알겠어."


용건이 없는 전화. 큰일이 없음을 확인하고 목소리로 컨디션을 가늠해 보는 딱 그 정도의 전화를 종종 주고받곤 합니다. 알지요. 이 전화엔 저를 염려하고 생각하는 마음이 담겨있다는 걸요.


과거의 어머니들은 문득 멀리 있는 자식이 걱정되면 어떻게 했을까요? 지금처럼 휴대폰도 심지어 집 전화도 없던 시절에요. 글도 모르고, 우체국이라는 것도 없어 편지도 보낼 수 없던 시절. 어머니들은 그 많은 염려를 어떻게 달랬을까요?


<차사본풀이>를 시작으로 한 번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염라대왕을 잡으러 길을 나선 강림은 정작 저승 가는 법을 몰라 당황한다.
그때 한 노파가 나타나 물으니 강림 집의 조왕이었다.
조왕은 그간 부인의 공덕이 깊으니 도와주겠다며 강림에게 저승 가는 법을 일러준다.


조왕신. 한 번쯤 들어본 적 있지 않으셔요? 부엌을 지키는 신. 솥이 있던 부뚜막에 있는 신이라고 믿었지요. 부엌이라는 집 안의 공간에 있는 신을 먼 길을 떠난 강림이 만났다는 이야기가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조왕은 어디서 내가 무얼 하는지 다 아는 전지전능한 그런 신도 아닌데 말이지요.


조왕은 흔히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신이라고 이야기되곤 합니다. 여성들의 주 공간이 부엌이었으니, 부엌의 신이 여성-어머니와 가장 가깝다는 말은 타당해 보입니다.

상상해 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신. 가장 많은 시간을 곁에 보내는 신. 나는 하루종일 많은 생각을 합니다. 오늘 반찬은 무얼 하면 좋을지. 올해 우리 집 농사는 어찌 될지. 막내가 아픈 건 언제 나을지. 멀리 길을 떠난 첫째는 밥은 굶지 않고 있을지. 어디가 아프진 않을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털어놓고 싶지 않을까요? 큰 보름달을 마주하면 담아왔던 소망을 와르르 쏟아내 버리듯 말이에요. 우리 가족의 무사와 안녕을 곁에 있는 신에게 털어놓지 않았을까요?


재미있는 것이 한국의 신, 그중에서도 특히 집의 공간을 관장하는 신은 신으로서 담당하는 분야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조금씩 변화해 왔다는 겁니다. 아주 오랜 시간 아프로디테가 미의 여신이고 에로스가 사랑의 신이었던 것과 다르게 말입니다. 조왕의 본래 성격은 그가 좌정해 있는 부엌이라는 공간 그리고 그 공간의 주요 사용자인 여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조금씩 조금씩 조왕신은 여성-어머니와의 관계 속에서 그 성격이 변화합니다. 어머니의 염려와 소망이 투영되어,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신으로 말입니다.

그리하여 갖게 된 하나의 능력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집을 떠난 가족의 안녕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멀리 떠난 강림이가 왜 조왕을 만났는지 이제 궁금증이 해결되셨나요? 조왕이 집을 떠난 가족을 보호해 주는 신이기에, 멀리서 헤매는 강림이 무사히 목적지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지요.


그래서 조왕을 믿지 않던 어머니들이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 조왕을 모시는 경우가 왕왕 있었습니다. 군대에서 지금보다 더 폭력적이고 위험한 일이 많이 일어나던 때. 그런데 연락도 자유롭지 않았지요. 얼마나 걱정이 되었을까요. 어머니들은 조왕신에게 아들이 무사히 전역하게 해달라고 빌며 불안한 마음을 달랬을 겁니다.


가끔 나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될 때가 있습니다. 속상한 일이 있을 때, 다가올 일이 어찌 될까 불안하고 두려울 때. 나의 마음이 그러하다고 말하며 나의 마음을 살피고 또 상대가 그것을 들어주고 "그랬구나"라며 작은 위로를 건네주면, 실상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편안해지곤 합니다. 신앙에는 늘 믿음의 문제가 따르지요. 조왕이 정말 멀리 떠나 있는 가족을 돌봐주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조왕이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말하고 기원하는 것만으로도 어머니들은 마음을 쓸어내렸을 겁니다.


누군가는 조왕에게 빌던 것이 미신이고 쓸데 없는 짓이라 말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것에 염려하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작은 위안이 되었을 거란 것만큼은 알아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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