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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Mar 11. 2024

'한(恨)'을 키워드로 읽는 <파묘>

벌써 파묘로 쓰는 세 번째 글이네요. 저의 전공 지식을 듬뿍 담아 글을 쓸 수 있어 기뻤고, 지난번 글이 감사하게도 다음 포털에 게시되면서 조회수 1만을 기록했습니다.


혹시 궁금한 분은 이 링크로 들어가시면 읽으실 수 있답니다. https://brunch.co.kr/@mythmyth/41


<파묘>로 하고픈 이야기가 너무 많지만, 딱 두 개의 이야기만 더 해볼까 합니다. 지금까지의 글들이 전공지식으로 부분 부분을 해석해 드리는 것이었다면, 오늘은 전공 지식을 살짝 섞어 영화의 스토리를 분석해 보려 합니다.



'한(恨)'

다른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국인 고유의 감정이라고 하지요.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한의 사전적 의미는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 '한'이라는 키워드로 <파묘>를 읽어보려 합니다.


▶ 전반부: 혼의 한풀이

이 영화는 박지용의 할아버지인 박근현이 가진 한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오랜 세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장손들의 귓가에 비명을 질러왔습니다. 그 탓에 박지용의 형은 자살까지 했지만, 그들은 비명 소리를 무시합니다.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마저 괴로워 울음을 그치지 않자 그제야 무당 '화림'을 찾습니다.


영화를 보면 오랜 시간 박지용을 비롯한 집안사람들이 박근현의 존재를 외면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외면한 이유는 아마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친일로 쌓아 올렸을 부로 호의호식하고 있으나, 그것이 자신들에게 큰 흠임을 알기에 "박지용 씨 우리한테 숨기고 있죠?"라는 말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함구합니다.


그 외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지점이 바로 혼이 미국 집을 찾아간 장면이라 생각합니다. 박종순이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창문을 엽니다. 그다음 들려왔던 소리를 혹시 기억하시나요? 아주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던 그 소리요.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음식을 먹은 후에 혼이 말합니다.

"아들아 이곳엔 젖과 꿀이 흐르는구나. 네가 호의호식하는 동안 나는 춥고 배고팠다."


묘를 찾아갔을 때 아주 초라한 묘가 봉분 모양이 엉망이 된 채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성묘를 가는 이도, 벌초를 하는 이도 없었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는 모양새였습니다.

그리고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던, 굶주린 혼의 행동에서 우리는 박 씨 집안에서 제사 또한 지내지 않았음을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굿을 하겠다고 하자 기도로 이겨내자던 어머니의 말에서 짐작건대 아마 이들은 기독교도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제사도 지내지 않을 테지요.

그러나 이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은 단순히 종교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자신들을 밑도 끝도 없는 부자로 만든 부끄러운 조상을 삭제하고픈 마음. 자신들을 치부를 삭제하고픈 마음 때문에 일부로라도 잊고 살았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의 저승관에 따르면, 귀신들은 생산활동을 할 수 없답니다. 오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마련해 준 음식을 먹고 살 뿐이죠. 그래서 굿을 하던 제사를 하던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음식입니다. 배불리 먹고 돌아가 자손들을 도와달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증손주가 태어날 때까지도 방치당했던 그 혼은 아주 많이 굶주렸을 겁니다. 굶주린 혼은 오랜 시간 소리쳤으나 자손들은 들어주지 않았고 그의 분노는 응어리가 져 한이 되었을 겁니다.


굿을 보러 다니던 때에 자식들이 연달아 죽어 평생 가까이해 본 적 없는 무당을 찾아와 굿을 하는 부모님들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굿에서 죽은 자식들의 혼과 함께 조상신을 달래던 것이 떠오릅니다. 아무리 그래도 자손을 해하는 조상이 있을까 싶지만, 종종 그렇다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파묘>의 전반부 또한 그러한 것이지요. 한풀이를 하고자 자손을 죽이는 혼의 이야기.


▶ 후반부: 한반도의 한풀이

박지용의 몸에 깃든 혼은 광화문 뒤에 조선총독부 건물을 봅니다. 그리고 그는 일제에 대한 충성을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말합니다.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이 말의 뉘앙스는 조금 불명확합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신의 묘를 좋은 터라 속이며 이용한 음양사 무라야마 준지에 대한 분노에 가까울 것입니다. 기순애가 여우의 일본어인 키츠네와 닮아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래 보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은 쇠말뚝을 찾아 없애는 여정을 그려냅니다.


저는 이와 관련하여서는 화림이 연기를 피우며 이용했던 나무에 자꾸만 시선이 갔습니다.

화림은 아마 신어머니를 따라 일본에 굿을 하러 다녔던 경험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자의 혼이 빗자루에 붙어 생긴 정령을 없애려는 굿이었던 듯하며, 그때 신어머니가 나무를 이용했던 것 같지요. 그것을 떠올리며 화림은 무덤 근처에 있는 신묘하게 생긴 나무에 연기를 피워 시야를 가리고, 자신이 그 산의 신인척 연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나무의 모습이 어땠는지 기억나시나요? 밑동이 아주 크고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나간 것이 기세가 남달랐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나무를 마을의 수호신이 깃든 '당산나무'로 모셔왔었지요. 또 산에 있는 아주 큰 나무에 그 산을 지키는 산신이 좌정해 있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본다면, 화림이 찾은 신령스러운 그 나무는 정말 그 산의 신이 깃들어있던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는 땅이 기운을 갖는다는 풍수의 시선을 긍정합니다. 그렇다면 영화 안에서는 오니가 지키고 있었던 쇠말뚝은 정말 한반도의 기운을 끊었겠지요. 땅의 기운이 끊어졌다면, 그곳을 지키는 신의 힘 또한 끊겼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쇠말뚝 때문에 산신이 죽고, 그가 깃들어 있던 나무 또한 죽어버린 채 가지만 앙상하게 남아있었던 게 아닐까요. 다시 말해 화림이 이용한 그 나무는 번성했던 한반도의 흔적 같은 것이지요.


산의 신은 사라지고 없으니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말을 화림이 대신해 줍니다. "이곳은 내 땅"이라고요. 화림의 일행은 죽은 자의 목소리를 대신 전해왔었습니다. (화림과 봉길은 박근현의 목소리를, 김상덕은 할머니가 배가 고프단 사실을) 산의 신은 사라지고 없으나, 이들이 대신 말하는 겁니다. 그리고 끝내 이들은 쇠말뚝 없애기를 성공합니다. 그런 점에서 <파묘>의 후반부는 쇠말뚝으로 인해 생긴 한반도의 한이 대리자이자,  국민에 의해 풀리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다음 그 나무가 어떻게 되었는지, 한반도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영화를 보며 우리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고, 또 영화관 밖을 나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제의 잔재를 눈여겨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파묘>는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무속이 콘텐츠에서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데, <파묘>는 뜯어보면 볼수록 참 놀랍습니다. 무속은 흔히 '맺힘과 풀림'이 핵심이라고들 합니다.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을 잔뜩 이야기하고 함께 먹고 춤을 추고 노래함으로써 풀어내는 것이 바로 무속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파묘>의 이야기는 무속적 사유와도 참 닮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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