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으그흐 Mar 25. 2024

[한국의 신화] 부분이 전체가 되지 않도록

*본 글은 명대신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누가 빌런이야?”


새로운 콘텐츠가 시작될 때면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빌런’ 다시 말해 그 이야기의 악역을 찾는 거죠. 대부분 아주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딱 봐도 저 사람이잖아.”


그런데 이 질문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 봅시다. 여러분의 삶 속 빌런은 누구인가요? 머릿속에 누가 떠올랐나요. 질문을 바꾸어 봅시다. 그 사람이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빌런일까요? 아마 대답하기 어려울 겁니다.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누군가가 타인에겐 좋은 사람, 혹은 사랑해 마지않는 이일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럼에도 누군가를 쉬이 악이라 단정 짓는 시각이 팽배한 지금의 풍조가 저는 조금 우려스럽습니다.


한국의 신화에도 악신이라 불리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천연두의 신인 ‘마마신’입니다. 지금은 천연두의 예방과 치료 모두 가능합니다. 그러나 치료법이 없던 시절, 천연두는 치사율이 높을뿐더러 살아남더라도 얼굴에 흉터가 남아 아주 무서운 병으로 여겨졌습니다. 오죽하면 천연두를 호랑이에게 해를 입는 것과 동일 선상에 놓은 ‘호환마마’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니까요. 이렇듯 무서운 병에 걸리게 하는 신이니, 마마신은 사람들에게 기피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겁니다.


「손님굿」은 마마신의 노정기, 즉 그가 본래 살던 강남국을 떠나 조선에 오는 여정을 담고있는 신화입니다. 신화에서도 마마신은 무서운 존재로 그려집니다. 마마신은 뱃사공이 자신을 홀대하자 그는 물론 그의 세 아들까지 죽여버립니다. 한 집안의 대를 끊어버린 겁니다. 마마신은 조선의 한 마을에 도착하고는 그 마을의 제일가는 부자인 김장자를 찾아갑니다. 집에는 대접할 곡식이 가득했음에도 김장자는 마마신을 무시하고 홀대합니다. 화가 난 마마신은 김장자의 외아들을 잡아갑니다. 천연두가 그러하듯 신화 속 마마신 또한 무자비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가로막거나 자신을 괄시하면 바로 목숨을 앗아갑니다. 반성의 기회도 주지 않으면서요.


그러나 마마신은 영화 〈파묘〉 속 오니와 같이 마주친 모든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악신은 아닙니다. 그는 사람을 판단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대접하는 태도를 보고 그를 병에 걸려 죽게 할지 결정하는 것이지요. 사공과 김장자는 운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마마신을 무시하고 홀대했기에 그 대가로 귀중한 목숨을 빼앗깁니다. 반면 가난한 노구할미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마마신을 정성을 다해 대접했고, 그 대가로 복을 받습니다. 마마신은 누군가에겐 복을 내리는 신이기도 한 것이죠. 조상신 또한 마마신과 같이 다면적입니다. 조상은 자손에게 마냥 친절하고 호의적일 것 같지만, 정성껏 모시지 않으면 해를 입힙니다. 제사를 축소하거나 없앨 때 주저하는 것은 이러한 점 때문입니다. 화가 난 조상은 꿈에 나타나거나 집에 작은 변고를 생기게 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파묘〉에서와 같이 자손을 죽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한국의 신화에는 절대적인 악신이 없습니다. 신은 사람의 태도에 따라 선신이 되기도, 악신이 되기도 합니다. 마마신은 김장자에게는 빌런일지 몰라도 노구할미에게는 은인일겁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 또한 그러합니다. 물론 영영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선과 악이라는 단 두 개의 시각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습니다. 성향을 판단하는 기준이 4가지(혈액형)에서 16가지(MBTI)로 늘어났음에도 어째서 여전히 사람은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기준으로 재단되는 것일까요?


한 사람을 악이라 규정하고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분명 악해 보일 겁니다. 편향적 정보 수집과 지나친 일반화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가 있을까요? 그러니 어떤 사람이 악인으로 보인다면, 혹은 그를 악인이라 단정 짓고 싶은 충동이 든다면 마마신을 떠올려 봅시다. 은인과 악신을 오가는 마마신으로 그 사람의 다면성을 상상해 봅시다. 물론 뱃사공이 자신의 행동으로 마마신을 분노하게 한 것처럼, 그 사람의 악한 면모가 우리의 탓으로 발휘된 것이라 여기자는 것은 아닙니다. 또 무조건 긍정적으로 평가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악이 그 사람을 구성하는 일부임을 수용하자는 것이지요. 내 안에 악이 존재함을 인정하나, 나를 악인이라 규정하지 않는 것처럼요. 이러한 이해를 토대로 좋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고 상대를 존중해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하니까요.


원문 출처: https://news.mju.ac.kr/news/articleView.html?idxno=1251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