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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May 06. 2024

[한국의 신] 한을 푸는 쉬운 방법

*본 글은 명대신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한(恨)이 한국인 고유의 정서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는 한이 있나요? 한의 사전적 정의처럼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이요.

민요 명인으로 방송에 출연한 분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고된 시집살이와 노동으로 쌓인 슬픔을 털어놓을 수 없어 자연스레 한이 생겼다고, 그런 마음을 담아 부르니 노래에서 자연스럽게 한이 녹아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마치고는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시집살이의 고통이 절절히 녹아있는 민요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마음과 꼭 맞는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의 한을 달래고 있었던 거지요. 그럼에도 노래가 한을 없애주진 못했을 겁니다. 슬픔의 원인은 바뀌지 않았을 테니까요.


민간에서는 고인이 죽을 때 한이 있으면 영혼이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풀리지 못한 한을 지닌 수많은 영혼이 우리 곁을 떠돌고 있는 것일까요? 이쯤에서 신화가 전해오는 의례인 ‘굿’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영혼을 천도하기 위한 굿을 칭하는 이름은 지역에 따라 다른데, 호남에서는 씻김굿이라 합니다. 씻김굿에는 길고 큰 무명필에 여러 개의 매듭을 만들고 그것을 푸는 ‘고풀이’가 있습니다. 여기서 무명 매듭은 망자의 한을 상징합니다. 무당은 노래와 춤으로 망자를 위로하며 천을 흔들어 ‘고’, 즉 망자의 한을 하나씩 풀어나갑니다. 매듭이 모두 풀리면 망자는 비로소 한을 모두 풀고 자유롭게 이승을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망자를 천도하기 위한 굿은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 중 저승에 가본 이는 없습니다. 갈 수 없는 곳으로 소중한 이를 떠나보내는 것은 슬프고 두려울 겁니다. 이때 신화는 그런 유족에게 말합니다. 「바리공주」의 바리공주가 망자를 저승으로 잘 인도해 줄 것이라고, 「동갑접기」처럼 망자가 저승에서 고초를 겪을 때면 동년배가 도와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지요. 그러는가 하면 저승은 이승과 마찬가지로 부패하여 뇌물을 주면 조금 더 수월하게 갈 수 있으니 노잣돈을 내놓게 하기도 합니다. 유족은 굿에서 망자가 이승을 향한 미련을 훌훌 털고 신들의 보호를 받아 저승에 무사히 당도하는 것을 목격함으로써 슬픔과 상실의 아픔을 달랩니다.


이때 하이라이트는 바로 망자의 영혼이 무녀의 몸에 깃드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녀의 몸에 빙의한 망자는 생전에 풀지 못한 아픔을 쏟아냅니다. “그때 부모님이…...”, “네가 그러지 않았더라면…….” 유족은 울며 사과합니다. “내가 미안해.” 유족과 무녀는 안고 서로를 용서합니다. 그리고 유족 또한 말합니다. “이 말을 못한 게 너무 후회되어서 꼭 말하고 싶었다”면서 말이지요.

드라마에서 종종 보듯 때로는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는 후회가 한이 됩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왜 하필 그것이었을까. 그게 내 진심이 아니었는데.” 이 후회를 극복할 기회가 굿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물론 무당의 몸에 깃든 것이 정말 망자의 영혼인지, 우리의 말이 망자에게 닿을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믿는 것만으로도 후회는 분명 줄어들 겁니다. 나는 분명 전했고 응답이 있었으니까요.


굿에 저런 대목이 있는 것은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묻어두기 때문일 겁니다. 갖가지 이유로 포기하며 내심 언젠가 기회가 있을 것이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때는 오지 않을 수도있고 너무 늦기도 합니다. 이것은 고마움과 사랑이 담긴 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말 안 해도 알겠지’하며 미루기도 하고, 또 본심과는 다른 말을 내뱉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을까요?

굿에서 무녀와 유족이 얼싸안고 우는 그 제의의 힘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신의 초자연적인 권능이나 무당의 화려한 기교가 아니라,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표현’에 있는 것이지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한을 풀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곧잘 이야기를 미룹니다. 마침 5월입니다. 감사와 사랑을 전할 명분이 곳곳에 있는 때입니다. 혹여나 전하지 못한 마음이 남아 한이 되지 않도록 5월을 핑계 삼아 마음을 표현해 보면 어떨까요? 표현의 힘을 믿으면서요.



원문 출처 : https://news.mju.ac.kr/news/articleView.html?idxno=1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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