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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May 23. 2023

[한국의 신화] 설정이 충돌하는 세계를 탐험하는 법

우리 잠깐 상상해 볼까요? 저승사자가 당신을 데리러 왔습니다.

"당신의 목숨은 다 하였소. 나와 함께 저승으로 가야 하오"

자 그럼 저승엔 어떻게 갈까요?

걸어서 산과 물을 건너갈까요? 아니면 무언가를 타고 저 아래 지하 세계로 내려갈까요?


한국의 저승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신과 함께>이나 <전설의 고향>에서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신들은 어디에 사는가, 저승은 어떻게 가는가는 잘 모릅니다. 혹 머릿속에서 "신은 올림푸스의 신들처럼 하늘에 있고, 저승은 땅에 있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미리 답해드리자면,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한국의 신화, 그중에서 민간의 신화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과거에는 기록이라는 것이 매우 고귀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글을 아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종이의 값도 비쌌으니까요. 그래서 기록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자본과 경제적 자본을 모두 갖추어야 했습니다. 기록할 수 있었던 이들에게 민중의 믿음은 삿된 것이었을 뿐이었기에 신화는 고귀한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일본인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일제는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민속을 조사했고, 그 속에서 신화도 채록되었습니다. 씁쓸하지만, 연구자에겐 매우 귀한 자료입니다. 타임머신이 개발된다면 과거로 돌아가 민중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할 정도로 자료가 없으니까요. 이거라도 감사하지요.

아무튼, 그 후로 민속 조사가 활발해지면서 전국 곳곳에서 전승되는 신화가 기록되었습니다. 약 90년간 자료가 축적된 결과 이제는 책을 통해 한국의 어느 지역에서 어떤 신화가 전승되는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자는 힘이 있습니다.

최근 연극에서는 대사를 자막으로 띄워주기도 합니다. 배우가 대사를 틀렸을 때 관객은 금방 알아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원대사를 아니까요. '원본과 다르잖아! 틀렸네!'하고 생각하는 것이죠.

기록하는 순간 신화에서도 '원형'이 생겨 벼렸습니다. "저 사람은 뭘 잘 모르네. 전에 이 지역에서 조사된 자료랑 영 달라." 그것이 본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음에도 말이지요. 이제 신화는 변할 수 없습니다.


신화가 변한다는 말이 이상하게 다가오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신화라는 것은 아주 먼 과거에 형성된 신비한 이야기라 여겨지니까요. 재미있게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자 여기서 또 질문을 드리지요. 과거는 언제 생겼을까요? 신화가 만들어진 먼 옛날보다 앞에, 아니면 뒤에 생겼을까요? 아마 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국의 신화에서 과거는 단골 소재로 등장합니다.


아버지가 없다고 놀림받던 삼 형제는 뛰어난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한다.
그러자 그들을 질투하던 무리가 삼 형제의 아버지가 스님임을 밝혀 과거 급제를 무효화한다.
<초공본풀이>


주로 홀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신의 자식들이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사회구성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음을 보일 때 과거가 등장합니다. 모두가 선망하는 것을 이룰 만큼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사람들에 의해 그 성취가 좌절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건 과거나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가 인정하는 조건을 갖추었다는 점입니다.

이 신화가 과거 제도보다 더 옛날에 생긴 것이라 가정한다면, 과거는 신화를 듣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으로 변한 결과일 겁니다. 신화가 기록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에는 과거가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조건이었던 것이지요. 만약 지금이라면 서울대나 대기업 합격, 고시 패스 같은 것으로 바꿀 수 있겠지요. 그러나 원형이 생기면서 과거에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신이 사는 세계의 위치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먼 옛날엔 신이 사는 세계에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바리공주는 부모님을 구할 약수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향한다.
먼 길을 걸어 저승에 당도했고, 온갖 지옥에서 괴로워하는 망자를 본다.
<바리공주>


바리공주는 부모님을 구할 약수를 얻기 위해 저승으로 향합니다. 사람이 저승에 갈 수 있다니 놀랍지요? 바리공주는 저승에 갑니다. 걷고 걸어서.

먼 과거의 사람들은 세계가 평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신의 세계도 우리와 같은 땅 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다만 아주 멀고 가는 길이 험난해 사람이 가기 힘들 뿐인 것이죠.


그러다 신의 세계는 더 높거나 낮은 곳에 있는 것으로 변화합니다. 


동해용왕따님아기가 방법을 몰라 출산시키지 못하여 인간 세상이 소란스러워진다.
그 소식이 하늘의 옥황상제에게 까지 닿는다.
그러자 옥황상제는 명진국따님아기를 삼신으로 임명하고 그를 인간 세계로 내려보낸다.
<삼승할망본풀이>


이제 신들은 인간과 분리된 하늘에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세계를 내려다 보지요. 인간들은 어떻게 사나, 그들에겐 무엇이 필요한가를 하늘 위에서 살핍니다. 마치 올림푸스의 신들처럼요.


그런데 위치가 변화한 후에도 바리공주는 수평으로 움직여 이승에서 저승으로 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들은 저 위에 아니면 저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바리공주>와 같은 수평적 세계관도 여전히 전해지는 것입니다. 신화는 변화의 흔적을 완벽히 지우지 않고 자신 안에 갖고 있습니다.




요즘 판타지의 작품성을 평가할 때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세계관입니다. 세계관이 얼마나 탄탄하고 일관성 있게 그려지는가. 설정 간의 충돌은 없는가.

그런데 한국 신화 세계엔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신화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 왔고, 그 결과 설정과 설정이 충돌합니다. 요즘의 판타지가 하나의 재료로 잘 그린 그림이라면, 한국의 신화는 콜라주와 같은 것이죠. 그것도 다른 시간대에 만들어진 재료를 마구 섞어 사용한.


평소 저의 [한국의 신화] 시리즈를 읽은 분들이라면 웬일로 현대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일지 의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수용할 수 있는 선에서 조금씩 조금씩 쌓여간 과정들을. 그래서 만들어진 아주 느슨한 연결과 충돌하는 지점들을.

가끔 "한 권으로 이해하는 한국신화 설정집"같은 것을 요구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매우 곤란합니다. 늘, 꼭 그런 건 아니니까요. 여기에선 그렇고 저기에서는 저러니까. 그런데 둘 다 틀린 건 아니니까. 


기록되고, 문화재의 일부로 지정됨에 따라 신화는 더 이상 변화할 수 없습니다. 실은 그래서 조금 염려됩니다. 마치 정답이 생겨버린 것만 같거든요. 과거는 수능으로 바뀔 수 없고, 신은 퀀텀 점프를 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가깝도록 신화가 조금씩 변화해 왔다면, 어느 순간부터 고정된 신화는 정답을 찾아야 하는 작품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화에는 수많은 변화가 충돌하며 쌓여 있기에 단 하나의 정답은 없습니다.


지금의 작품을 읽어가는 방식으로 신화를 이해하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꼭 그렇지도 않은" 세계가 주는 자유를 누려보면 어떨까요? 정답이 없는 세계가 주는 자유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우리도 느슨한 태도로 신화를 읽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곳에서 당신이 중심이 되었으면 합니다. 어떤 신화가 재밌었나요? 어떤 부분이 흥미로웠나요? 어떤 설정이 취향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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