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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May 30. 2023

[한국의 신화] 악신은 없다

"신은 저런 사람 안 잡아가고 뭐 하나 몰라"

끔찍한 사람을 마주할 때면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신이 있다면 이럴 순 없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절망적인 일이 벌어지기도 하지요. 신이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면 하고 생각하다, 신은 인간의 행복을 바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의 신화를 찬찬히 떠올려보다가 한국의 신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신의 이미지는 성경이나 그리스 신화 속 신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습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한다거나, 절대적인 선 혹은 악을 상징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신과 함께: 이승 편>에서 성주는 참 좋은 신으로 그려집니다. 자신에게 기도했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합니다. 무력한 인간의 편에 서서 최선을 다해 싸우기도 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참 재미있게도 실제 성주는 집안에 큰일이 닥쳤을 때 가족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집을 나가 근처 나무에 머무른다고 합니다. 성주는 시끄럽고 더러운 일을 싫어하거든요.

잘 좀 봐달라고 매일 기도하는데 막상 나쁜 일이 일어나면 떠나버리다니 참 이상하지요? 지켜주려고 노력을 하다가 포기하고 나가는 것인지. '인간들아 맛 좀 봐라 그러게 제대로 살라고 했지?' 하고 떠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신이 미디어 속 성주처럼 인간을 위해 죽을 각오로 싸워주는, 절대적인 선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인간을 사랑해 마지않는, 그래서 인간을 위해 몸 바쳐 헌신하는 신은 없습니다. 그보다는 관망하며 인간을 관찰합니다. 저놈이 잘 사나 보자. 나에게 기도를 정성껏 올리나 보자. 어디 한 번 보자. 내가 한 번 생각해 볼게.


그렇다면 악신은 없을까요? 이 문제는 조금 복잡합니다. 비윤리적인 과거를 가진 존재들이 있거든요.

농경의 신인 자청비를 강간하려 한 우마의 신 정수남이라던가(<세경본풀이>), 본처를 죽인 후에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 본처의 일곱 아들도 모두 죽이려 한 변소의 신 노일저대귀일의 딸(<문전본풀이>)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이들이 저지른 잘못은 신이 되기 전에 한 것이고, 그 잘못을 뉘우친 후에 신으로 좌정합니다. 그러나 반성했다고 해서 과거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일까요. 측신은 매우 까탈스러워서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는 사람에겐 쉽게 해를 끼칩니다. 변소에 노크를 하지 않고 들어간다거나, 실수로 변기에 빠질 경우 측신의 노여움을 사 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이 되기 전에 잘못했고,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다고 하여 그를 악신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노크를 하고 변기에 빠지지 않으면 해를 끼치지 않으니까요.


악신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악귀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쉬울까요. 늘 인간에게 화가 나있고, 별 이유 없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만 하는 존재. 만약 이것이 악신이라 한다면 한국 신화에서 악신은 없습니다. 물론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신은 있죠. 대표적으로 마마신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질병이 신이나 귀신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마마신은 그중에서도 마마 즉 천연두를 앓게 하는 신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과거에 천연두는 치사율이 높아서 결렸다 하면 죽기 십상이었고, 살아남는다 해도 얼굴에 크게 흉이 졌지요. 사람들에게 마마신은 곧 질병이자 죽음이었고 그래서 그를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면 마마신은 마주치는 모든 인간을 천연두에 걸리게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또한 다른 신들과 마찬가지로 지켜보았습니다.


"저놈이 나한테 잘하나 보자.
나에게 기도를 정성껏 올리나 보자.
어디 한 번 보자. 내가 생각해 볼게."

마마신은 자신을 홀대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천연두에 걸리게 합니다. 마음에 안 든다며 아이의 얼굴을 마마 자국 가득한 곰보로 만들어버리기도 하지요. 또 자신을 무시한 일가를 모두 죽여버리기도 하는 잔인한 신입니다.

그러는 한편 자신에게 정성을 다한 사람은 따뜻하게 대합니다. 없는 살림에도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예를 다한 가족에게는 명과 복을 줍니다. 물론 여전히 고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신이지만요.

이처럼 마마신은 누군가에게는 집안을 망하게 한 악신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복을 준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런 것처럼 한국의 신화에서 절대적인 '악신'은 없습니다. 모두 상대적이며 사람 하기에 달렸죠.


하물며 조상도 그렇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 가족의 중요성! 무엇보다 가족! 을 외치면서 조상도 자손들을 "어디 한 번 보자"하며 바라본다니 이상하죠? 그래서 제가 만나본 무당 중 한 분은 "아니 어떻게 조상님이 자식을 해하겠어요.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렇지만 분명 신화에는 있습니다. 그런 조상님이요.

<장자풀이> 속 장자는 아주 부자였는데 조상을 위한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조상들이 저승왕을 찾아가 말합니다. "저 불효막심한 저놈! 벌 좀 주십시오." 그러자 저승왕은 장자를 잡아오라며 저승사자를 보냅니다. 자신들에게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자손을 죽이려는 조상이라니! 놀랍지만 그것이 바로 신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제사 앞에서는 장사 없는 것이죠.


정성이라는 게 별게 아닙니다. 신의 권위를 존중할 것. 화려하진 않더라도 신을 위한 상을 차리고 정성스럽게 기도드릴 것. 그를 믿고 모시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신은 사람에게 명과 복을 주고, 액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해 줍니다. 지난번 글에서 이야기했듯 한국의 신화는 설정이 충돌하는 세계이지만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나에게 영원히 적대적인 존재는 없다는 것. 내가 잘하기만 한다면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존재라니 꼭 사람과 닮아 있지 않나요. 나에게 영원히 호의적인 존재는 없잖아요.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도 내가 소홀히 하거나 함부로 대하면 멀어지듯, 신과의 관계에서도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했던 겁니다. 상대를 존중하고, 마음을 다하는 노력.

"신이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뭐래. 네가 지난 세월 동안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 생각해 봐. 난 충분히 참았고 기회를 줬어. 내 탓하지 말고 너부터 돌아봐."


그러나 이런 점이 한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신이 인간을 자신을 어떻게 대접하나로 평가한다면, 신에게만 잘한다면 아무리 악한 인가도 벌을 받지 않으니까요. 신이 옳고 그름을 판별해주지 않으면 세상은 더더욱 어지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악신은 없다 해도 악인이 있다는 걸 우린 알잖아요. 그럼 악인은 어떻게 될까요?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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