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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Jun 13. 2023

[한국의 신화] 악인의 조건

신이 선악을 분별하지 않는다고 하여 세상에 악이 없을까요?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뉴스에서 보았죠. 범죄는 날이 갈수록 흉악해지는 것만 같고,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누구보다 발 빠르게 새로운 방법으로 일어납니다.

신화의 세계에도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이 있습니다.


신화에서 살인은 왕왕 일어납니다.

심지어 저승사자의 내력을 담은 제주도의 <차사본풀이>와 함경도의 <짐가제굿>은 살인으로 시작하죠.


삼 형제는 긴 수련 기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몇 날 며칠을 걷다 지친 삼 형제는 한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고자 한다.
집주인은 선뜻 방을 내어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삼 형제는 그들이 가져온 물건을 탐낸 집주인에 의해 살해당한다.


살인의 원인은 아주 단순합니다. 물건에 대한 욕망.


신화에서 범죄라 칭할 수 있는 악행은 이러한 욕망에서 기인합니다. 소유욕, 성욕과 같은 것. 지금도 반복되는 수많은 악행의 원인들.


그렇다면 범죄를 저지른 인물은 어떻게 될까요? 신의 분노를 사 벼락을 맞아 죽을까요? 

<차사본풀이>의 이야기를 조금 더 살펴봅시다.


살해당한 삼 형제는 원수를 갚고자 집주인의 아이로 태어난다.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바쳐 복수한다.
부모가 가장 기쁜 날인, 삼 형제가 과거에 급제해서 돌아온 날 죽어버리는 것으로.
그러자 집주인은 원님에게 자신의 아들들이 한날한시에 죽은 이유를 파헤쳐달라며 난리를 친다.
원님은 그 진상을 견디지 못하고 옥황상제의 힘까지 동원하여 사건의 전말을 파헤친다.
그 결과 과거에 그가 삼 형제를 살해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집주인은 벌을 받는다.


물욕에 사로잡혀 삼 형제를 살해했던 집주인은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누가 벌을 주었는가를 명확하게 말하긴 어렵습니다. 마지막에 짠하고 나타나 삼 형제의 시체를 증거로 내세우며 집주인에게 벌을 내린 것은 염라대왕입니다. 하지만 염라대왕이 "인간 세계에 아주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어"하고 발 벗고 나섰을까요? 아닙니다. 인간인 강림이 어렵게 저승에 가 요청하자 그제야 와서 도움을 주었을 뿐입니다.


염라대왕을 불러오기까지의 인간 세계 속 행정 기관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인간 세계의 일은 인간 세계의 법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랑 전설>을 혹시 들어보셨나요? <장화 홍련>은요?

이야기를 읽으며 참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으신가요.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직접 가서 자신을 죽인 사람의 죽이지 않는 것이. 무릇 원혼이라 하면 초자연적인 힘이 있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아랑도 장화홍련도 그러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님 앞에 가서 저의 억울한 사연을 해결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합니다. 귀신을 본 원님이 깜짝 놀라 죽기를 반복하는데 그들은 그 방법을 고수합니다.


신화에서도 설화에서도 인간 세계에서 일어난 일은 원님이 상징하는 인간 세계의 질서로 해결하고자 합니다.


신화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을 신이 나서서 징벌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신은 사람이 간청하면 나타나서 도움을 줄 뿐입니다.

물론 피해 당사자가 벌하기도 합니다. 단, 당사자가 죽지 않았다는 가정 하에서요.

신이 선악의 기준을 갖지 않아도 되었던 것은 그만큼 인간 세계를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악인은 있고 그들은 나쁜 일을 저질러.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질서가 있고, 올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 악인이 있습니다.

바로 놀부와 같은 인물들이지요. 나쁘긴 나쁜데 범죄자는 아닌. 형사 고발을 할 수는 없지만 미운 사람들이요.

신화는 그들을 악인으로 그려냅니다.


대표적으로 <장자풀이> 속 사마장자가 있습니다.

사마장자는 아주 부자였어요. 그런데 인심이 고약했습니다. 그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과연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남에게 쌀을 줄 때 모래 섞기
남에게 간장을 줄 때 빗물 섞기
남에게 김치 줄 때 우거지 섞기


<장자풀이>에는 사마장자가 어떤 죄를 지었나 가 길게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중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바로 저것입니다. 조금 귀엽지 않나요. 그리고 이게 신이 화날 만큼의 죄인가 싶기도 하지요. 살인에도 화를 내지 않았던 신이 쌀에 모래 좀 섞었다고 죽이려 들다니?

물론 신이 가장 노했던 것은 자신들에게 제대로 된 정성을 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마장자가 제사를 잘 안 지낸 점만 이야기하면 되지, 왜 저런 자잘한 것까지 가져오는 것일까요?


과거의 전통사회에 특성에 비추어 보자면 사마장자는 그저 제사를 잘 안 지내고 인색한 사람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옛날엔 먹을 것이 매우 귀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마을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복지 체제가 비교적 미비했기 때문에, 복지에 준하는 나눔과 베풂이 마을에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 역할을 부잣집에서 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사마장자는 사람들에게 베풀기는커녕 쌀에 모래를 섞는 기만을 저지른 것입니다.


인간 세상의 질서인 법으로 다스릴 수는 없었습니다. 베풂은 사회적으로 권장되는 덕목일 뿐 의무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신화에서는 사마장자의 인색한 태도를 '죄'라고 명명해 버립니다. 그리곤 그가 신들에게 벌을 받는 것으로 그려냅니다.

신의 앞에서 그것이 죄가 된다면 조금은 두렵지 않았을까요? 천벌은 무서우니까. 사마장자가 결국 신의 벌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반성하고 또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는지도 모릅니다.


부자의 미덕을 거론할 때 누군가는 내가 가진 것은 내가 쌓아 올렸는데 그것을 왜 응당 내어놓아야 하는지 반문했을 겁니다. 그 질문에 신화는 대답합니다.

외면하고 무시하여 사람들의 삶이 스러져가도록 방치하는 것 또한 악인의 조건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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