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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Jun 20. 2023

[한국의 신화] 무당의 기원

"자네 본관이 어디인가?"라는 질문 혹시 들어보셨나요? 그러면 가족에게 들었던 말을 더듬으며 '저는 무슨 이 씨 무슨 공파의 몇 대손입니다.'라고 대답하게 되지요. '본관'에 대한 정보는 내 성씨의 조상이 누구이고 어느 지역에서 비롯한 것인지 그리고 그 조상과 나 사이의 시간적 거리를 가늠할 수 있게 합니다.

저는 본관이 타인을 이해하는데 유의미한 정보를 전달해주진 못한다 생각해, 누군가에게 본관을 물어본 적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유의미한 정보인지는 의문이 들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성씨 시조 신화'입니다. 성씨 시조의 탄생과 성씨가 부여된 사연을 담고 있는 신화입니다. 씨족 안에서는 한때 신성성을 가졌던 이야기이기에 '신화'라고 불리지만, 지금의 시각으로는 역사보다는 장난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 제가 딱 한 번 읽고 잊어버리지 않는 성씨시조신화가 있는데요. 바로 충주 어 씨의 시조 신화입니다.  한 여인이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바락바락 옷감을 씻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물에서 아주 큰 물고기가 튀어 오르는 게 아니겠어요. 그리곤 물고기가 그 여인의 허리를 한 번 탁하고 쳤습니다. 그 뒤로부터 태기가 있어 낳은 사람이 바로 충주 어(魚)씨의 시조입니다.


대학 수업에서 이 이야기를 처음 읽곤 큰 혼란에 빠졌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물고기 어(魚)씨이니까  "니 조상 물고기!"하고  놀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것을 후손들은 왜 신성한 이야기라고 여겼던 것일까 하고 실눈을 떴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충주 어 씨의 족보에 실린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조상이 물고기에서 비롯한 것은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물고기가 아닙니다. 꿈에서 만난 신비한 물고기가 여인의 뱃속으로 쏙 들어갔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겨드랑이에 물고기 같은 비늘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 장차 충주 어 씨의 조상이 되는 것이지요.

옛사람들은 동물 중에서도 성스러운 존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신비한 물고기의 혼이 다시 태어난 것이 조상이라는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성씨에 대한 자부심을 주었을는지도 모릅니다. 본관을 말할 때 자신의 조상이 역사적 인물이라며 뿌듯해하는 것처럼. 이젠 신비한 동물도, 역사적 인물도 자긍심을 가져다주진 못하지만요.


우리는 왜 우리의 시작이 어디인지 궁금해할까요. 그리고 나의 기원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탐색하려는 것일까요? 지금의 우리에게 본관과 성씨시조신화가 날 설명해 줄 수 없는 정보가 되어버린 것은 이야기 속 세계와 우리가 사는 세계가 너무 달라서가 아닐까요.




그런데 지금도 활발히 전승되고, 누군가에게는 신성한 이야기로 여겨지는 조상 신화가 있습니다. 바로 무조신화, 즉 무당들의 조상 신화입니다. 최초의 무당은 누구인지, 그 힘은 어디에서 비롯하였는지, 굿이라는 의례는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와 같은 것들입니다.


무조신화는 굿에서 노래로 불리기도 하고 또 이야기로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무조신화의 대표 격으로 여겨지는 것은 <바리공주>입니다. (바리공주가 마지막에 자신의 만신의 왕이 되겠다고 선언을 하여서 그를 무조신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보다는 제주도에서 전해지는 <초공본풀이>와 동해안 연안, 그중에서도 강릉을 중심으로 전승되는 <계면굿>을 더 좋아합니다. <바리공주>는 멋지기만 한다면, <초공본풀이>와 <계면굿>에는 삶의 질곡과 멋짐이 다 나타나거든요.


여러분은 무당 하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나요? 많은 분들이 <더글로리> 속 무당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네요. 진한 눈화장을 하고, 번지르르하고 두루뭉술한 말로 사람들을 속여 돈이나 한탕하려는 존재들 정도려 나요. 무당의 점사가 진짜냐 사기냐를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보다는 사기꾼이라 의심하고 비난하면서도 힘들 땐 무당을 찾는 사람들의 이중성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과거에도 무당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이렇듯 모순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땐 신분제 사회였잖아요. 사람들은 실제 신분과 관계없이 무당은 천민이라 여겼죠. 사람들의 하대와 멸시로 인해 무당은 마을 안에서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마을 변두리나 인적이 드문 곳에서 떨어져 지냈지요.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필요할 땐 무당을 찾아가 간절히 빌었습니다. 가까이하기 싫지만, 필요하다면 기꺼이 찾는 사람들.

저는 가끔 상상해 보다 사람들이 끔찍해 진저리 칩니다. 너무 쉽게 상처를 주고, 태도를 바꾸잖아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래도 마땅하다 여기면서.


그래서일까요. 무조신화에도 사람들의 멸시가 나타납니다.

삼 형제는 아주 똑똑하여 과거 공부를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삼 형제를 질투한 또래들은 그들이 공부하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다.
우여곡절 끝에 과거를 보았고, 삼 형제는 당당하게 장원급제한다.
그러자 또래들이 삼 형제의 과거급제를 취소하려고 갖은 방법으로 음해하다, 삼 형제의 어머니를 감금해 죽인다.
<초공본풀이>


삼 형제는 또래들과 같이 공부하고 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절대 또래가 될 수 없습니다. 또래는 그들을 '또래'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거든요. 삼 형제는 자신이 또래와 마찬가지임을 확인하고자 할 때마다 더 상처받습니다. 그들은 절대 같아질 수도, 받아들여질 수도 없음을 확인할 따름입니다.

꼭 질병과 삶의 고난을 해결해 주는, 마을 사람들의 삶에 있어 아주 긴밀한 존재이지만 절대 마을의 일원이 될 수 없었던 무당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나요?



신화 속 무당의 조상은 당하기만 했을까요? 여러분도 종종 상상해보지 않나요. '내가 만약 돈이 많았다면', '내가 조금 더 키가 컸다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무당들도 상상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더 힘이 셌다면 하고요.


삼 형제를 만난 아버지는 굿을 해야만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며, 굿 하는 법을 알려준다.
삼 형제는 굿을 위한 악기와 도구를 만들고 굿을 하여 어머니를 살린다.
그리고 신칼로 또래를 죽여 복수한다.
<초공본풀이>


삼 형제는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신인 아버지에게 굿하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렇게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처음으로 굿을 하는, 무당의 조상이 됩니다. 인간 세상에서 명예인 과거를 포기한 것이죠. 또래의 일원이 되는 것 또한 포기합니다. 대신 자신들만의 길을 찾은 거죠.

그리고 자신을 멸시한 사람들에게 복수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과거 급제'를 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이 다룰 수 있는 '신칼'로요.


<계면굿>도 비슷합니다.

마을 사람들이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계면 할머니를 멸시한다.
화가 난 계면 할머니는 사람들에게 병을 안겨준다.
단골들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한다.
<계면굿>


계면 할머니는 성격이 아주 화끈합니다. 자신을 무시한 사람들에게 병을 주어 자신의 힘에 굴복하게 만듭니다. 신성한 힘을 사용해 사람들에게 있어 자신의 입지를 다시 세우는 것이지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지만 다른 방법으로 대응합니다. 그들이 우러러보는 무언갈 쟁취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보이는 것이죠.


무조 신화는 참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무당으로 살아가는 것의 괴로움과 무당이 가진 힘의 위력이 아주 긴밀하게 엮여 있습니다.

꼭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무당으로 살아가는 거 힘들지. 평범한 사회 구성원이 될 수 없을지 몰라. 사람들은 널 멸시하고 미워할지도 몰라. 그런데 말이야. 너에겐 힘이 있어. 그들이 널 찾을 수밖에 없는 힘. 멸시를 꺾어버릴 수 있는 힘.


처음 이 신화를 읽을 땐 신기했습니다. 조상을 마냥 멋진 사람이 아니라 소외되고 핍박받는 존재로 그려낸다는 것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신화를 전하는 무당은 자신과 조상의 삶이 같아서 이 이야기를 더 쉽게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결국 남들은 갖지 못한 힘으로 이겨내는 모습을 보며, 자신을 독특한 운명에 처하게 한 그 힘을 오히려 긍정하게 되었을는지도 모른다고.


마냥 멋지고 대단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나와 같이 멸시받지만 결국은 이겨내는 존재.
닮아서 나를 더 이해하게 해주는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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