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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장메이트신화라 Dec 21. 2022

엄마의 엄마는 딸을 기억할까.

70된 딸이 90엄마를 보살피기

앞에 글에서도 살짝 언급이 됐지만,

우리 엄마 민주씨의 엄마는 딸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괴팍한 성질을 가지고 시시때때로 때리던 남편을 피해서

아이들을 두고 도망치기를 밥먹듯이 했고,

그런 남편의 화는 고스란히 아이들, 특히 첫째였던 민주씨가 고스란히 받아야했다.


그런 아버지가 싫어서 20살즈음 

고향 친구와 함께 경남 사천에서 서울까지 도망치듯 나왔단다.

타향살이에 그래도 엄마가 보고 싶어서

집으로 편지를 썼다가 

괴팍한 아버지에게 잡혀오기도 했단다.


딸이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아도 

와서 미역국 끓여주지 않았고,

오직 괴팍한 남편의 시중을 들었다고 했다.


타향살이를 하다가 오랫만에 집에 갔던 민주씨는 

얼굴도 모르는 막내 동생이 또 있는걸 보고

엄마에게 제발 더 이상 아이 좀 낳지 말라며 

퍼부었다고 했다.

(그 이모는 나와 8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둘째 이모가 결혼 할 때도 민주씨가 엄마를 대신해

상견례도 하고, 혼수도 마련 해주었다.

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결혼식 당일에만 와서

부모 자리에 앉아있기만 했다.


내가 첫 병원 생활을 진주에서 하면서

첫 월급을 타서 퇴근 후 외할머니께 꿀을 한 병 사갔었다.

할머니는 '뭘 이런걸 사오노'라는 말만 하시고,

물이나 밥을 차려주시지도 않았다.

할 이야기가 없던 나도 조금 앉아있다가 

꿀만 드리고 나왔던 기억이 난다.


결혼을 하고 민주씨와 남편과 나는 

외갓집에 잠시 들릴 일이 있었다.

할머니는 그 때도 손주사위에게 물 한잔 주시지 않았고,

오히려 엄마인 민주씨가 미안해하며

물이라도 한 잔 마시라고 했었다.


그런 할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건 몇 년 됐다.

경증의 얌전한 치매라며 

요양보호사는 그리 힘들지 않게 

할머니 밥을 차려드리고 도와드린다고 했다.


며칠 전, 할머니의 치매가 심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멀리 있으면서 일이 바쁜 삼촌이 일이 한가해질 때와서

할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그 동안에 엄마가 일을 마치고 할머니에게 가봐야겠다고 

내게 할머니가 쓰실 기저귀, 연고 등을 사오라는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 때도 그랬다.

자라면서 예쁨 받고, 재산 받고 했던 자식들은 오지 않았고,

매번 맞고 (자신을 닮았다고) 미움 받았던

민주씨가 할아버지의 요양병원을 알아보았고,

면회를 다녔고, 마지막을 지켰다.


이번에도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 것 같아서

엄마에게 '삼촌이 알아서 하라고 그래'라고 말했지만,

어쨌든 엄마에게 엄마이기 때문에 

그게 어려운가보다.


나는 내 엄마가 고생하는게 보기 싫고,

내 엄마는 또 자신의 엄마가 어려움에 처하는게 불편하다.

외할머니는 그런 딸을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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