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별로 만나는 우리나라 석탑(3)

고려 시대 석탑의 다양한 얼굴

by 제이미



언젠가 인류 진화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는 여러 인류가 한 시기 안에서 공존하며 살아가다 서서히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를 왜 꺼내느냐 싶겠지만, 나는 석탑을 답사를 할 때, 특히 고려 시대의 석탑을 볼 때마다 그 다큐멘터리가 자꾸 생각난다.


우리는 보통 백제 석탑 → 통일신라 석탑 → 고려 석탑처럼 시대가 바뀌면 양식도 명확하게 교체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유적을 따라가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한 양식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다른 양식이 겹쳐 나타나고, 오래된 양식이 느닷없이 다시 등장하고, 새로운 시도가 그 위에 덧입혀지는 “겹침의 시간”이 존재한다.


고려 석탑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같은 시기 안에서, 백제 계통의 부드러운 비례, 통일신라의 정형, 고려 고유의 다각다층 장식미가 나란히 공존한다. 그래서 고려 석탑을 보면, 나는 그 다큐 속에서 서로 다른 인류가 한 시기 안에 뒤섞여 살아가던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고려 시대의 석탑은 통일신라가 완성한 정연한 체계를 바탕으로 출발하지만, 세기가 흐르면서 그 틀은 점차 느슨해진다. 학계에서 고려 석탑을 ‘정형의 해체기’ 혹은 ‘다변화의 시대’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통일신라의 엄격한 비례와 구조 원리는 약화되고, 대신 장식성과 수직적 상승감을 지향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동시에 등장한다.


고려 석탑의 흐름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① 단순화와 생략, ② 다각다층의 확장, ③ 국제적 양식의 유입이라는 세 방향에서 대표적인 석탑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남계원 칠층석탑 — 단순화와 생략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고려 석탑이 통일신라의 정형으로부터 어떻게 멀어지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준다. 이중기단의 엄격한 구조가 약화되어 기단부가 눈에 띄게 단순해진다. 통일신라 탑에서 보이던 기둥 장식(우주와 탱주)이 생략되었고, 그리고 옥개받침의 단수 역시 줄어들었다.

image.png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사진출처: 국가유산청)

이는 섬세한 기교보다는 단순하고 실용적인 미감으로 이행하던 당시의 변화를 상징한다. 웅장함보다는 담백함을 택한 고려인들의 실질적인 태도가 투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남계원지 칠층석탑의 기단을 살펴보면, 통일신라 시기에 흔한 ‘두 개의 우주와 두 개의 탱주가 뚜렷이 표현된 하대석’을 찾아보기 어렵다.


(2)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 다각다층의 양식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사진출처: 국가유산청)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고려 초중기에 만들어진 팔각 다층 석탑으로, 일부 연구에서는 고구려·발해계 다층 탑 전통과 연결되는 계보 속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다만 현존 양식만 놓고 보면, 통일신라의 삼층 석탑 정형에서 벗어나 수직적 상승감과 다층 구조를 실험한 ‘고려식 다각다층 석탑’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옥개석(지붕돌) 끝에 매달린 풍경과 화려한 장식들은 고려인들이 추구했던 장식적 화려함과 역동적인 불교 신앙의 단면을 보여준다.


(3) 경천사지 십층석탑 — 국제적 불교미술의 유입

개성 경천사지 십층석탑

고려 후기, 충목왕 때 세워진 이 탑은 당시 고려가 마주했던 국제적인 불교 문화의 흐름을 가장 선명하게 반영하고 있다. 흔한 화강암이 아닌 대리석을 사용했으며 층마다 화려한 불보살과 천인이 정교하게 조각되어있다.


또한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원(元)나라의 라마불교 조형과 티베트식 백탑의 영향을 가장 선명하게 반영한 석탑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 석탑 중 가장 국제적이고 이례적인 조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요약 — 고려 석탑의 특징

한 시대 안에서 서로 다른 석탑 양식이 동시에 공존

통일신라 정형양식의 단순화와 생략

다각다층 구조와 장식성, 수직적 상승감

라마불교의 영향


이번 장에서는 통일신라의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단순화와 생략, 다각다층 구조의 확장, 국제적 양식의 유입이라는 세 갈래 흐름을 통해 고려 석탑의 변화 양상을 살펴보았다.


고려 석탑은 단순히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다른 양식들이 한 공간에서 숨 쉬며 공존했던 '역동적인 겹침의 장'이었다. 이러한 다양성은 고려라는 사회가 가진 개방성과 포용력을 보여주는 가장 단단한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큰 흐름 속에서, 각 지역과 계통에 뿌리를 둔 전통들은 어떻게 이어지고 변형되었을까. 다음 글에서는 고려 시대 석탑을 백제계, 통일신라계, 고려 고유 계통으로 나누어, 각 계통이 어떤 조형적 특징을 지니며 계승되고 변화해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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