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시대 석탑
오늘 답사할 곳은 부여다. 부여는 예전 백제의 수도 사비(泗沘)였던 곳이다. 지금은 조용한 시골 도시처럼 보이지만, 천오백 년 전에는 백제의 문화와 정치가 모두 모여 있던 찬란한 중심지였다.
그 흔적이 지금은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정림사지 역시 그중 가장 상징적인 공간 중 하나다.
백제 석탑의 부드러운 곡선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탑
부여 시외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저녁 먹을 곳을 찾으려고 골목을 걷던 중, 예상치 못하게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마주했다. 담장 너머로 환하게 트인 절터 한가운데 돌탑이 우뚝 서 있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작다'였다. 바로 전에 미륵사지 석탑을 보고 온 탓도 있겠지만 사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실제 높이는 8.33미터로 3층짜리 건물 정도 되는, 생각보다 제법 높은 키를 갖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석탑 앞에 서자 높이가 실감 나기 시작했다. 다른 석탑들이 큰 면석 몇 장으로 탑신을 구성하는 데 비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작은 돌들이 촘촘히 모여 탑의 몸통을 이루고 있다. 각각의 돌들은 날카롭지 않고 둥글게 다듬어져 있어서, 탑 전체가 어딘가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준다.
그러다 탑신 1층에서 뜻밖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돌기둥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희미하게 글자의 윤곽이 보였다. 처음엔 돌의 풍화 자국인가 싶었는데, 각도를 바꿔 다시 보자 분명 ’百(백)’이라는 한자였다.
안내판을 확인하고서야 전체 문장을 알 수 있었다.
‘大唐平百濟(대당평백제)’.
백제가 멸망한 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새긴 글씨였다.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400년 동안 비바람에 깎이고 닳아서, 이제는 ‘百’ 한 글자조차 겨우 알아볼 정도다. 하지만 그 희미함이 오히려 더 오래 눈에 남았다. 지워지지 않고 여기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 나라의 마지막이 기록된 장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시선을 위로 올려 옥개석을 바라보았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에서도 미륵사지에서 보았던 것처럼, 끝이 살짝 들린 옥개석이 눈에 들어왔다. 얇게 뻗어나가다가 마지막에 살짝 위로 들리는 그 선을 보고 있자니, ‘이런 지붕선이 바로 백제 석탑의 미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미륵사지 석탑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나란히 떠올려 보면, 둘은 규모도 다르고 분위기도 조금씩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은은한 인상이 남는다. 과장되지 않은 옥개석의 들림, 부드럽게 다듬어진 돌 표면, 군더더기 없는 비례까지.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백제다움”은 어쩌면 이런 억지로 드러내지 않는 균형감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먹기 전 잠깐 들를 생각으로 스쳐 지나가려던 자리였는데, 정림사지 오층석탑 앞에서 꽤 오래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탑이지만,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