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왕의 몰락과 금산사 오층석탑

고려시대 석탑

by 제이미


지금까지 여러 곳을 답사하며 많은 지역을 다녔지만, 김제는 이번이 처음이다. 오늘의 답사지인 모악산 역시 답사를 준비하면서 처음 알게 된 곳이었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이렇게 새로운 장소와 이름을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금산사로 향하던 길 위에서 만난 금평저수지

모악산은 전북 김제와 완주에 걸쳐 있는 산으로, 예부터 ‘모악(母岳) – 모든 산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로 신령한 산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그 이름 때문인지, 아직 산에 오르기도 전인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경건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 답사할 곳인 금산사는 이 모악산 자락에 자리한 천년 사찰로, 백제 법왕(599) 때 창건되어 통일신라·고려·조선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금산사는 고려사의 격동 속에서도 그 중심에 있었던 사찰이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권력 다툼 끝에 아들 신검에게 유폐되었던 장소가 바로 금산사다.


견훤은 이곳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해 고려 태조 왕건에게 의탁했고, 그 과정이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제작시기: 고려시대

국보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39

답사일: 2025년 11월 29일


사찰 입구까지 차로 오를 수 있는 덕분에 어렵지 않게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미륵전이 눈에 들어왔다. 3층 규모의 웅장한 목조 건물로, 층마다 다른 현판이 걸려 있었다. 방문 당시 외부 보수 공사가 진행 중이라 건물 외형을 온전히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보수 공사 중인 금산사 미륵전

미륵전을 둘러보고 나오니 사찰 중앙에 육각 다층석탑이 있었고, 그 뒤편으로 대적광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육각 다층석탑은 뒤에서 다시 다루겠지만, 점판암(벼루 만드는 석재)을 사용해 전체가 검은빛을 띠는 고려 초기 석탑이라는 점만 짚어 두고 넘어가겠다.

대적광전 앞에서 바라본 금산사 오층석탑

대적광전 오른편으로 시선을 돌리는 순간, 금산사 오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바라본 첫인상은 단정한 균형이었다. 탑신부 각 층이 흐트러짐 없이 차분하게 쌓여 있어, 전체적으로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기단부 정면

가까이 다가가 기단을 살펴보았다. 하대석과 상대석을 갖춘 이중 기단 형식을 취하고 있어 얼핏 보면 통일신라 석탑의 구조를 따르는 듯하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신라식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기단부는 여러 장의 별석을 조합해 쌓은 방식인데, 이런 구성은 오히려 백제계 석탑의 기단부를 떠올리게 한다.


상대석 면석에는 중앙에 탱주 하나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 석탑에서 보이던 엄격한 구성과는 달리, 형식이 한층 단순해진 모습이다. 구조는 이어가되, 표현은 절제된 듯한 인상이 남는다.

탑신부 정면

옥개석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처마 끝이 석가탑을 떠올리게 할 만큼 날카롭고 곧다. 불필요한 장식 없이 깔끔한 게 통일신라 석탑의 분위기를 닮아있다.


옥개받침은 각 층마다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일신라 석탑의 정형인 5단 받침에 비해 단수가 줄어든 모습으로, 전통적 구조를 계승하면서도 점차 간략화되어 가는 흐름을 보여준다.

탑신부 옆면

금산사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의 형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고려 시대 특유의 단순화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석탑이었다. 책에서 배운 ‘양식의 전환’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 비례와 선의 변화로 남아 있음을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 특히 인상 깊었다.


시대별 석탑 양식의 흐름을 눈으로 짚어보는 일도 흥미로웠지만, 이곳이 역사적 사건의 무대였다는 사실이 더 오래 남았다. 후백제의 격동과 고려 건국의 전환점이 되었던 공간에 직접 서 있었다는 감각은 단순한 답사이상의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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