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계 고려시대 석탑
석탑을 답사하기 위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도시 김제로 향했다. 김제는 전라북도 익산 아래쪽에 있는 작은 도시다.
수원에서 차로 세 시간을 달렸을까 지평선의 도시라는 말답게, 김제에 가까워질수록 창밖으로 넓은 들판이 끝없이 이어졌다.
추수가 끝난 뒤라 황금빛 물결 대신 하얗게 비어 있는 논이 이어졌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동시에 가을에 다시 와야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제작시기: 고려시대
전라북도 유형문화유산
소재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답사일: 2025년 11월 29일
‘귀신사’라는 이름이 꽤 독특하다. 나도 처음에는 왜 절의 이름이 귀신일까 라는 생각이 들어 찾아보니 鬼神(귀신)이 아니라 歸信(귀신)이었다. 믿음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절이다.
귀신사는 통일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해골물의 원효와 함께 언급되는 인물인 의상은 당나라에서 화엄을 배우고 돌아와 화엄종을 열었고, 부석사와 낙산사 등을 창건했다. 귀신사 또한 그 흐름 속에 자리한 절이다.
귀신사에 도착해 돌계단을 오르자 대적광전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부에는 보물로 지정된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나, 방문한 날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이번 답사의 목적은 석탑이었으니 아쉬움을 뒤로하고 언덕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산전을 지나 고개를 들자, 그제야 언덕 위로 삼층석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귀신사 삼층석탑은 특이하게도 대적광전 앞마당이 아닌, 그 뒤편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탑 앞에는 작은 공터가 펼쳐져 있는데, 이곳이 옛 금당지인지, 아니면 후대에 석탑이 옮겨진 자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귀신사 삼층석탑은 고려 시대에 세워진 탑이지만, 백제 양식을 크게 반영한 석탑이다. 그래서인지 처음 마주한 순간,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축소해 놓은 듯한 ‘미니 버전’이라는 인상이 먼저 스쳤다. 지대석 위에 두 장의 돌로 계단식 기단을 쌓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구조다.
지붕돌(옥개석)은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비해 낙수면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 직선적인 느낌보다는 완만한 곡선의 인상을 준다. 옥개석과 옥개받침은 일부가 여러 장의 돌을 짜 맞춘 별석 구조를 이루는데, 이러한 수법은 이 탑이 백제 석탑 전통을 계승한 고려 초기 석탑이라는 점과도 맞닿아 있다.
탑신부는 1층과 2·3층의 구성 방식이 다르다. 초층 탑신은 우주와 면석을 따로 짜 맞춘 구조이지만, 2층과 3층 탑신은 양 모서리에 우주를 새긴 단일석으로 이루어져 있어, 위로 올라갈수록 구조가 간결해지는 경향을 잘 보여 준다.
귀신사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투박한 느낌도 있지만, 비례에서 오는 단정한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탑이었다. 다만 상륜부를 포함해 여기저기 손상된 부분이 많아,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점이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이 탑의 진짜 인상은 구조보다 위치에서 온다. 석탑이 선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래로는 대적광전과 마을이, 뒤로는 모악산과 숲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치 석탑이 절의 한가운데서 시간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자리다.
석탑을 보러 온 길이었지만, 결국 오래 기억에 남을 장면은 이 언덕에서 내려다본 대적광전과 모악산 풍경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