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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진 Oct 03. 2015

은행나무 이야기


“으 냄새. 도대체 누가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심은 거야!”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나오던 친구는 투덜대기 시작했다. 학교 앞에도, 집 앞에도 유난히 은행나무가 많았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나무에 은행이 열렸고, 길에 떨어져 냄새를 풍겼다. 어두운 길에 은행알이라도 밟을까 겅중거리며 집에 도착하니 그달의 과학잡지가 도착해 있었다. 학습지는 제대로 풀어본 적이 드물지만, 과학동아나 뉴턴 등의 과학잡지라면 온종일 샅샅이 들여다보고는 했다. 마침 은행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특정기간의 냄새만 제외하면 가로수로서의 장점이 많았다.

약 3억 5,000만 년 전인 고생대 석탄기 초에 출현하여 가장 오래된 식물의 하나인 은행나무는 그 당시 여러 대륙에 분포했다. 북미와 호주, 시베리아에서도 화석이 발견될 정도로 번성했지만, 지금은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만 자란다. 남미나 스페인 남부에서 오렌지 나무를 가로수로 활용하듯 은행나무 역시 지역 고유의 가로수인 것이다. 과실이 열린다는 점도 있지만 은행나무는 특히 공기정화기능이 탁월하다. 게다가 공해가 심한 도시에서의 자생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가로수가 되기에 좋은 조건이다.

물론 모든 은행나무에 은행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한 나무에서 암꽃과 수꽃이 모두 피어나는 다른 나무들과 달리 암수가 나뉘어 있고, 암나무에서만 은행이 열린다. 보통 열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은행알은 종자라고 해야 맞다. 소나무의 솔방울과 같이 생식기관인 밑씨가 노출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수나무의 정충에는 동물의 정자와 같이 운동성을 가진 꼬리가 달려있다.

은행에서 냄새가 나는 이유는 둘러싸고 있는 겉껍질의 은행산이라는 성분 때문이다. 맛도 좋고 영양이 풍부한 은행은 쉽게 동물들의 먹이가 된다. 하지만 은행 자체가 씨앗인 그들에게는 치명적이다. 사과나 배처럼 과육이 먹이가 된 다음 씨앗이 배설되는 과정을 거칠 수 없기 때문이다. 먹혀버린다면 번식 자체가 불가능한것이다. 그래서 동물들이 싫어하는 고약한 냄새를 가짐으로써 종자를 지킬 수 있게 했다. 은행의 입장이 이해가 됐다.

그럼 수나무만 가로수로 심으면 되지 않을까? 더욱 독특하게도 은행나무의 암수 구별은 다 자란 뒤 은행을 맺어야 확인이 가능하다. 보통의 어린나무가 종자를 맺는 데는 20~25년 정도가 걸린다. 그러니 그때는 너무 늦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눈이 번쩍 뜨였다. 맙소사. 어떤 나무인지도 모르고 20년을 넘게 살아가야 한다니. 만일 내가 그렇다면 어떨까? 성별도 모른채 어른이 된다면.... 

비단 식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입에 취업에 매달리고 있던 현실이 생각났다. 과연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 쓰일 재목인지를 알고 달리는 학생은 몇이나 될까? 공부를 잘하면 의대나 법대등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학교의 특성과 관계없이 배치표가 정하는대로 원서를 넣는다. 이후에도 우리는 알찬 결실을 위해 전력으로 달린다. 그러나 만약 은행알을 가질 수 없는 나무인데도 그것을 위해 25년을 바친다면? 반대로 은행을 맺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에도 종자가 생겨버린다면?

어린 나무일 때부터 어떤 나무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단 어떤 대학에 가겠다는 것에 목표를 둔다. 그리고 자라보니 은행을 맺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방황 할 수 밖에 없다.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찾아 노력을 기울이기까지 기다리다간 도태되고 만다는 생각은 버렸으면 좋겠다. 주위를 보니 너무 일찍 정해버리면 그 안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성급하게 정하기 전에 천천히 성장의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 오래도록 건강한 과실을 맺는 길일지 모른다.

Valencia, S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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