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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진 Nov 20. 2015

위스키 성지 여행

뜻밖의 양주

김중만 선생님에게서 사진을 배우던 때의 일이다. 한 위스키 회사에서 전 세계의 문화인을 대상으로 해마다 마크 오브 리스펙트라는 상을 수여하는데, 그해에 김중만 선생님이 선정되었다. 본사가 있는 영국에서 수상하고 더불어 새로운 위스키 제품의 출시에 맞춰 스코틀랜드 사진전도 열게 되었다. 2주 동안 스코틀랜드의 풍광과 증류소의 모습을 담아오기로 한 것이다.

떠나기 전 미리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 위스키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연금술의 발달이 가져온 증류 기술이 아일랜드로 건너갔다가 다시 스코틀랜드로 건너간 과정은 흥미로웠다. 당시 과도한 세금을 피해 스코틀랜드의 북부 산간 하일랜드 지방에 숨어서 부족한 연료를 보충하기 위해 토탄을 사용하고, 내놓고 팔지 못한 탓에 오래 보관하기 위해 쓰고 남은 오크통에 보관한 것이 풍미를 더욱 좋게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위스키의 매력은 끝이 없었다.

처음 도착한 스코틀랜드의 작은 도시 스페이사이드Speyside에는 다양한 종류의 증류소가 있고,몇개의 위스키회사들이 여러 증류소를 거느리고 있다. 각자의 특색과 환경에 맞게 생산된 위스키를 납품하기도 하고 자체적으로 이름을 붙여 판매하는 곳이다. 특히나 우리가 방문한 첫 번째 증류소인 스트라스아일라 Strathisla는 1786년에 세워진 스코틀랜드에서도 가장 오래된 증류소 중 하나다. 독특한 건물의 모양과 아름다운 풍경 덕에 신혼부부의 웨딩사진 촬영지로 쓰일 정도란다.


1823년 하일랜드의 상원의원인 알렉산더 고든이 밀주의 양성화를 위해 새로운 조세안을 제안하고 통과된 덕에 소규모 증류소에서 합법적으로 위스키를 주조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기술의 발달로 미국과 다른 지역에서도 연속식 증류를 통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과거의 방식 그대로 구리로 만든 단식 증류기를 사용하여 기존의 풍미를 유지한다. 그중 이곳 스트라스아일라 역시 자신들만의 역사와 전통으로 위스키를 생산한다.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술이 차지하는 비중은 생각보다 크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어코 만들어내고야 마는 애주가들이 전 세계에 살고 있는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오죽하면 히말라야 해발 3,000m의 외딴 마을에서도 사과를 가지고 증류주를 만들겠는가 말이다.

술을 만드는 재료는 정말 다양하다. 흔하게 쌀과 포도, 보리나 홉뿐만 아니라 남미의 사탕수수나 아가베, 동유럽의 감자와 자두, 히말라야 지방의 사과나 조 등 모두 각 지역에 맞는 재료와 양조방법을 택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각 풍토와 문화, 거기에 기술까지를 전부 아우르는 음식 문화의 정수는 바로 술이 아닐까 생각한다. 특히 위스키는 그 지역의 특산품이 전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해냈다.

촬영을 떠나오기 전 공부를 하다 알게 된 전설적인 인물, 콜린 스캇은 시바스 그룹의 블렌드 마스터다. 무려 30년이 넘도록 로열살루트와 시바스 리갈의 위스키를 꼼꼼히 관리해 세계 3대 명장의 반열에 들었다. 내심 혹시라도 그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가 직접 우리를 위해 증류 과정과 숙성설비를 소개해주었다. 여러 곳을 둘러보던 중 어느 보관창고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커다란 오크통이 줄지어 보관된 창고의 깊숙한 귀퉁이에 감옥과 같은 철창이 있었던 것. 거기에는 영국 특유의 문장이 새겨진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있었다. 그 안에 누워있는 오크통 세개. 거기에는 각기 엘리자베스 여왕과 찰스 왕세자, 헨리 왕자의 사인이 적혀 있다. 해마다 그들의 생일에만 개봉하는 귀한 술이었다. 이름하여 로열 살루트 볼트. 오크통은 주먹만 한 코르크로 막혀 있었고, 나무망치로 주변을 통통통 쳐주니 스스로 솟아올랐다. 코르크에서 퍼지는 향기만으로도 오랜 시간의 깊은 달콤함이 전해졌다. 콜린스캇은 긴 스포이트로 원액을 꺼내 아주 작은 잔에다 바닥에 깔릴 만큼씩 따라주었다.

로열 살루트 자체가 1953년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대관식에 헌정되면서 처음 세상에 나왔으니 오래된 회사는 아니지만 핵심 원액으로 사용하는 글렌리벳과 스트라스 아일라는 오랜 시간 인정받아온 위스키이다. 특히나 지하 깊숙한 곳에 은밀하게 자리한 로열 살루트 볼트는 생에 다시 볼 수 있을까 하는 새로운 경험이 되었다. 이미 그 자리에 있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 되는 것.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Copyright. 시바스브라더스 제공


이전에 내가 경험해본 위스키라고 해봐야 어쩌다 한번씩 먹게 되는 맥주에 섞는 용도이거나 그리 긴 시간 숙성되지 않은 그저 ‘양주’라는 개념의 술이었다. 그래서 머리로는 이해했어도 굳이 찾아서 먹고 싶을 만큼은 아닌 독한 술이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힘이라는 것은 모든 면에서 강력한 부분이 있어서 한잔에 축적된 세월의 맛은 확연히 달랐다. 이것이 위스키로구나, 싶었다. 과하게 목을 긁고 내려가지 않으면서도 입안 가득 퍼지는 풍미. 마시고 난 뒤에도 보리를 굽는 듯 미미한 불냄새가 났다.

기쁨의 시간은 마지막에 절정을 맞이했다. 긴 시간의 설명을 마친 우리의 블렌드 마스터는 넓고 고풍스러운 방으로 안내했다. 커다란 테이블에 줄지어 선수 없이 많은 튤립 모양의 위스키 잔. 글렌케언 Glencairn이라 부르는 이 잔은 마시는 사람이 위스키의 향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생산된 지 3년이 된 것부터 50년에 이르기까지 수십 잔이 놓여있었다. 전에는 전혀 알 수 없는 각각의 차이를 한자리에서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증류한 횟수에 따라서도 달라지지만 숙성기간의 차이를 더욱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9년, 10년에 이르면서 아직은 거칠지만 안정된 풍미를 내기 시작하고, 15년을 넘어가면서 한 번, 21, 22년을 넘기면서 또 한 번 부드러움을 갖추기 시작한다. 특히나 30년의 숙성에 이르면 깊고 진하면서도 전혀 부담되지 않는 위스키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단지 오래 걸리기 때문에 비싸게 팔리는 것이 아니라 오래 숙성할수록 정확하면서 부드러운 개성을 갖게 되고 그것이 그 술의 진가를 알려주기 때문이리라.

술이 이러할진대 사람이라고 다르겠는가. 단순히 발효주를 끓인다 해서 증류주가 되지 않는 것처럼 나이만 먹는다 해서 어른이라 할 수 없지 않을까.

조금만 마셔도 금세 코가 발그레해지는 콜린 스캇을 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술을 즐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철학을 갖고 평생을 함께한다는 것. 그는 미각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담배도 피우지 않고, 자극적인 음식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한 대상을 오래도록 곁에 두고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다. 요즘처럼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때라면 더욱 그렇다. 긴 시간을 소중한 파트너와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일이다. 특히 나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에 무언가를 내놓는다는 것은 정성과 부담을 동반하는 일이다.


우리의 시간은 어떻게 숙성되어 가고 있는 걸까.


-전명진 에세이 <낯선>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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