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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진 Jun 09. 2016

비 오는 방콕의 밤

경험. 아아. 경험.

딱 10년 전이다.

소중한 벗들과 처음 카오산에 왔던 것이.  

그때의 기억이 좋아서 기회만 닿으면 방콕을 경유지로 넣고는 한다. 그 뒤로 70곳이 넘는 나라를 다녔고, 이것저것 많이도 주워 들었더랬다.


이번 밀라노도 그렇다. 방콕의 마지막 밤, 이전의 숙소에서 짐을 빼고 이른 비행시간에 맞추기 위해 공항 근처에 잡아둔 숙소를 향했다. 짐을 싣고 떠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졌고, 동남아시아의 기습폭우가 그렇듯 무시무시한 천둥과 번개를 데려왔다. 택시기사는 처음 보는 주소를 찾느라 빗줄기 사이를 두리번거려야 했다. 막상 도착한 곳은 공항에서 가깝지만 아주 한적한 어느 아파트. 리셉션은커녕 비를 피하기도 마땅치가 않은 곳.

뭐지?

기사는 이미 가버렸고, 예약사이트에 나온 주소지를 찾아내느라 온 몸이 흠뻑 젖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호텔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조용한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주소가 맞으니 뭐라도 있겠지. 하고

벌컥.

문을 열었는데,

흐앍!


세상에나 평범한 부부가 아주 편한 복장으로 원룸에 앉아있다. 원시부족을 정벌하러 나선 패권국가의 어느 군인의 마음이 그랬으리라. 대단히 미안한 마음을 담이 사과를 하고 허겁지겁 문을 닫았다. 그들의 공간을 침범했다는 미안함도 그렇지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를 이해해내는게 더 시급했다.

뭐지?

어디 다른 공간이 있나?

홀딱 젖은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자기 집을 침범당한 아저씨가 헐레벌떡 달려 나온다.

오오오 아냐 미안하다고 했잖아. 엘리베이터야 빨리 열려라. 그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호텔을 예약했는데 혹시 아느냐고 답했다. 응 그럴리가 없겠지. 그야말로 난닝구 차림의 아저씬데.

고개를 한참 갸웃거리던 그는 혹시 이름이 준이냐고 묻는다.

어어어 그거 난데. 준명진이죠 내가!

막 웃더니만 자기 집으로 들어오란다. 젖은 발이 부끄럽다. 모니터를 확인하고는 나에게 좀 전에 메일을 보냈단다. 아니 뭔 소리여. 이제 멜을 보내면 어쩌냐.

다시 보니 나는 날짜를 착각했고, 도착은 내일 저녁으로 되어있었다.

살다 살다 이런 실수를 하는구나. 젖은 발 보다도 방심했던 자신이 더더 부끄러워졌다. 그들은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데 우연히 호텔 사이트에 올린 것을 내가 예약했고, 도착시간에 맞춰 공항으로 데리러 가겠다는 메일을 보냈단다. 하. 일찍도 보낸다 그래. 물론 전적으로 나의 실수였고, 호텔 사이트 측에는 제대로 설명을 되어있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이 너무 늦게 메일을 보내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다.

그러더니 걱정하지 말라며 자기네 방에서 자고 가란다. 뭐? 여기서? 침대와 책상을 빼면 딱 한 사람 누울 자리가 나오는데, 거기 이불을 깔아준단다. 내가 예약한 방은 오늘 자리가 찼다며. 그리고는 나를 남겨둔 채 그 방에 묵을 손님을 데리러 갔다. 허허허허...

한국에서 온 손님을 배려한다며 아리랑 티비를 틀어둔 채로 말이다. 전날 먹고 남은 싱하 한 병을 앞에 두고 주인 없는 집에서 티비를 보고 있는 나를 본다.


이제껏 감히 경험 부자라 했다.

베이컨이나 로크까지 불러다 앉히지 않더라도, 경험은 나에게 큰 스승이고 종교였다. 겪을 만큼 겪었다 생각했지만 여전히 어리고, 여전히 일천했다. 이제 에피소드는 됐으니 '오늘도 무사히'를 되뇌며 여행하는 내가 있다. 친절한 주인 부부 덕에 잘 씻고, 원룸 한켠에서 잘 자고 일어나 이른 아침 차를 얻어 타고 공항에 왔다. 그들은 에어비앤비를 운영하는데, 나는 호텔을 예약해두고서, 카우치서핑을 했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인생공부겠지. 경험. 그거 어디까지 해봐야 되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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